엊그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양력과 음력이 일치하여 삼십팔 년 전 그날처럼 열나흘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모처럼 식탁보를 깔고 정성껏 음식을 차린 후, 레드와인을 따랐다. ‘짠’ 하자 그가 “우리 싸우지 맙시다.”한다. 내가 웃는다. 그는 언제나 축배를 들 때마다 똑같은 멘트를 한다. 우리는 지금도 곧잘 싸운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싸움에서 목소리가 큰 어머니가 미웠고, 나는 목청이 나팔 같은 아버지 밑에서 소리 한번 지르면 꼼짝 못하는 어머니가 싫었다. 내가 우리의 토닥거림을 적극적인 대화라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에 대한 도전이라 믿는다. 왜 싸울까? 예부터 부부의 인연은 칠겁(七劫)의 세월 속에서 한 올 두 올 짜여진 비단과 같다 했는데, 우리는 상극으로 만났음이 틀림없다. 그가 물이라면 나는 불이며 여름나무이고 그는 겨울나무이다. 그가 이성적이고 난 감성적이라 E.Q도 반대다. 체질도 내가 소음인인데 비해 그는 소양인이라 찬 음식을 좋아하고 나는 성정이 따뜻한 음식이 몸에 맞는다. 내가 산(酸)이라면 그는 알카리이고 그가 N극이면 나는 물론 S극이다. 그는 매사에 부정적이라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사람이다. 그가 돌다리를 두드려 보고도 못 건넌다면 나는 김치국부터 마시다 혼줄나기도 한다. 긍정으로 맞서다가 희망에 속아 넘어진 것이다. 그는 미리 절망에 속기도 한다. 그가 가끔 내게 시거든 떫지나 말라한다. 그럼 나는 동냥을 안 주려면 쪽박이나 깨지 말라고 응수한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누구든 오누이냐고 물었다. 살다보니 나이가 들수록 제 색깔이 뚜렷해진다. 늙어가며 얼굴이 닮아가는 사람은, 상대방 눈만 보아도 속을 알아차린다는데 우리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 속을 점점 모른다. 부부일심 동체? 우린 동상이몽이다. 남들은 늘 함께 다니는 우리를 부럽다고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이다. 돌아서면 티격태격 하는 것이 우리 부부가 사는 참 모습이다. 우리에게 ‘거리(距離)’가 필요함을 확실히 안 것은, 밀림이 되어가는 과수원을 보면서 였다. 밀감나무가 어릴 때는 방풍수(防風樹))도 바람막이로 큰 역할을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햇빛을 차단하는 피해수가 되었다. 그 방풍림 정리만 해도 귤나무는 좋아했다. 또 얼마 지나니 과수원은 원시림을 방불케 했다. 품종이 좋지 않은 것부터 솎아내기 시작했다. 몇 해 안 가 그 자리가 또 메워지면서 옆 나무끼리 얼키고 설켰다. 맞닿은 부분은 서로 열매 맺기에 경쟁을 벌였지만 수확할 때 보니 병과(病果)가 되어 파지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가지까지 고사(枯死)하기도 했다. 간벌을 해서 뚝뚝 떨어뜨려 놓는 방법 밖에 없었다. 햇볕과 통풍을 위해 나무를 솎아내거나 수관을 축소했다. 수확량의 감소를 우려했지만 맛도 나아지고 비(非)상품과도 줄고 가격도 잘 받았다. 결국 나무도 존재의 거리를 유지해야 스트레스가 없어진다는 것을 본 셈이다. 사실 그가 직장에 나갈 때는 싸울 일이 없었다. 은퇴 후 한참 지나서야 우리도 나무처럼 별도의 존재 공간이 필요함을 알았다. 안전거리가 필요했다. 우선 방(房) 만이라도 따로 쓰기로 했다. 아, 이렇게 편할 수가 ! 그가 자기 방에서 늦도록 티브이를 보아도 간섭하는 사람 없고, 나는 내 방에서 나대로 노트북을 켜도, 혼자 굿을 해도 얼굴을 붉힐 일이 없어졌다. 체조도 하고 훌라후프를 돌리며, 친구와 전화도 마음 놓고 건다. 책이나 신문을 읽고 스크랩 정리를 하기도 한다. 밤의 내 라이프스타일이 변했다. 내친김에 과수원도 반으로 갈라 따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라디오를 들으며 일을 하고, 나는 내 취향대로 산새소리를 들으며 김을 맨다. 써니가 바쁘게 우리 사이를 오가며 말을 시킨다. 남편과 스물네 시간을 같이할 때는 잠시만 부대껴도 발화(發火)가 쉬웠다. 예전에 그가 일 년간 회사 일로 미국에 가 있은 일이 있었다. 참 묘하게도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부터 그리움이 치솟기 시작했다. 나는 삼 일 간격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도 매일 그림엽서를 보내는 등 오히려 그 때 일심동체(?)로 살았던 것을 보면 사랑의 힘이란 떨어질수록 자력이 강함을 실감했다고나 할까. 그러고 보면 그와 나의 사랑의 안전거리는 그만큼의 간격이 필요했다는 증거이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한 마당 안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그럼 친구 사이, 동료사이, 사제지간, 고부 사이는 어떨까. 로버트 프러스트는 이웃사이는 담장이 튼튼해야 좋은 관계가 된다고 알쏭한 시를 썼다. ‘담’이란 경계이며 분쟁지대이다. 인간 사이에도 경계와 간격이 오히려 소통을 원활히 한다는 뜻일 것이다. 생전의 우리 시어머님은 딸네 집에 닷새 이상 머물면 꼭 싸우고 마음이 상해서 돌아 오셨다. 모녀지간에도 간격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사물 간에 거리가 없어진다면 우주 전체의 충돌로 모든 것이 소멸하지 않을까. 천체 간의 간격이, 한 치의 오차 없이 억겁 동안 자기 길을 운행함이 우주의 질서일 것이다. 어느 시인은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울울창창 숲도 간격이 있었다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산불이 때론 존재 공간의 부족으로 자연 발화하듯이 부부지간도 안전거리를 가질수록, 또는 적당한 담도 필요하리라. 가끔 마을 어귀에 있는 수백 년생 느티나무나 팽나무를 보며, 만일 나도 자리만 넉넉했다면 무엇이 돼도 되지 않았을까하면서 웃음을 흘린다. 하느님은 내 떡잎을 이미 알아 보셨을 텐데 말이다. 달이 친구하자고 나를 불러낸다. 그러나 달은 나를 기다리지 않고 저만치 앞서간다. 처음으로 지구가 이렇게 빨리 자전하고 있음을 생각해 본다. 내가 구르지 않음이 새삼스럽다. 그래 그렇구나. 지구와 달의 간격 그리고 나와 달의 거리가 황금비로 이루어 졌음일 것이다. 셋의 인력(引力)의 합일이다. 우리가 싸울 땐 그와 나의 인력에 빨간 불이 켜졌음이다. 부부란, 동반자라는 이름의 한 축에 원심력과 구심력 사이의 완충지대를 공유함으로서 소통이란 안전지대를 구축하지 싶다. 아무렴 우리의 싸움은 산과 알카리의 화학반응이 중화하여 사랑의 물질을 만들 수 있는 그 거리를 유지하면서 오월동주(吳越同舟)로 항해를 하고 있으리라. 적당한 거리는 소외가 아니라 조화이며 평화이고 소통이다. 극과 극이 오히려 자장(磁場)이 강한 이치이리라. 만일 그가 잠시 집을 비우는 날엔 나는 허전해 아무 일도 못 할지 모른다. 그가 있음에 내가 있고, 이 우주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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