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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이야기(사진)

줄탁동시(啐啄同時)에 대하여

by 안규수 2021. 5. 13.

♣ 줄탁동시(啐啄同時)에 대하여 ♣

선불교에 있어 대표적 선문답서인 『벽암록(碧巖錄)』 제16칙에
啐啄(줄탁)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본래 “啐啄同機(줄탁동기)” 라는 사자성어로
중국의 민간에서 쓰이던 말이었는데, 송(宋)나라 때
임제종(臨濟宗)의 공안집(公案集:화두집)인 『벽암록(碧巖錄)』에
공안으로 등장하면서 불가(佛家)의 중요한 공안이 되었으며
줄여서 "줄탁"(啐啄)이라고도 합니다.

불가에서 이 말을 인연에 비유하여 많이 사용합니다.

 

쪼을 줄(啐), 쪼을 탁(啄). 어미닭이 알을 품고 있다가 때가 되면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개 되는데 이것을 '줄(啐)' 이라하고,

어미닭이 그 소리에 반응해서 바깥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탁(啄)' 이라고 합니다.

 

줄과 탁을 통하여 병아리가 제때 부화하듯

적절한 시기에 줄탁을 통해 어떤 일이 완성됨을 뜻하는 것으로

불가의 중요한 화두가 된 “啐啄同機(줄탁동기)”

 

또는 "啐啄同時(줄탁동시)" 라는 말의 의미는

스승이 제자를 지도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어미닭이 소중하게 알을 품듯이,

스승이 제자를 끊임없이 보살펴서 그 근기가 무르익었을 때

깨달음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 "줄탁(啐啄)"은 어느 한쪽의 힘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야만

병아리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껍질 안의 병아리가 힘이 부족하거나,

반대로 껍질 바깥 어미닭의 노력이 함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아리는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겠지요.

껍질을 경계로 두 존재의 힘이 하나로 모아졌을 때 새로운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이 비유는 결국 이 세상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타인의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렇다면 「줄탁동시」가 이루어질 조건들은 무엇일까요?

 

그 첫 번째는 "적극성"입니다.

즉 내가 먼저 완성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계획하고

시도하지 않으면 결과는 없을 것입니다.

 

그 두 번째는 "준비성"입니다.

즉 완성을 위해 준비하고 경청하고 대비하는 자세로

어디서 무슨 소리가 언제 어떻게 들려올 것인가에 대해

시그널(signal)을 잘 살피는 자세야 말로 "줄탁동시"의 핵심조건입니다.

기다리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야 합니다.

 

그 세 번째는 "적시성"입니다.

즉, 완성을 위한 타이밍(timing)이 맞아야 합니다.

위의 두 조건 즉 "적극성"과 "준비성"이 갖추어졌을지라도

적시(timing)에 행하지 않으면 완성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기다릴 때 기다리고, 할 때 행하는 것이 적시성이며 행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 네 번째는 "관계성"입니다.

즉 하나가 아닌 둘 이상의 개체들 간 어떤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의 의지를 품고 있을 때 줄탁은 일어납니다.

이 모든 개체들이 상호 어떤 관계 하에서 줄탁동시 했을 때,

또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서로에게 다가설 때 비로소 어떤 일이 성사되고

그 일이 빛을 발하게 될 것이란 뜻입니다.

 

그 다섯 번째는 "동시성"입니다.

즉 "줄"과 "탁"이 "동시"에 일어나야 합니다.

 

줄탁동시의 묘(妙)는 기다림에 있습니다.

서로 "줄"과 "탁"이 필요한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을 만들기 위해

늘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 생각하고 행동함을 뜻하는 줄탁동시의 결과로

나타나는 어떤 하나의 완성, 그 완성이야 말로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시기가 올 때까지 제자는 오매불망 정진에 힘써야 하는 것은 물론입니다.

이와 같이 스승과 제자의 행동이 동시에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되는 겁니다.

알을 깨는 일이란 존재의 혁명입니다, 스스로를 깨고 나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요,

스트레스와 불안 그리고 두려움이 당연히 존재합니다.

밖에선 그걸 살펴 그 마음의 껍질부터 깨어 나올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이지만,

밖이 아무리 돕는다 하더라도 안에서 필요한 건 모두 스스로 해야 한다는 자립심이다.

깨우침에 이르게 하는 추진체는 1%의 스승과 99%의 자기입니다.

그러나 1%의 탁이라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닙니다.

그 1%가 제대로 핀트를 맞추지 못하면 99%가 깨우칠 길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