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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사인용 식탁/김채영

by 안규수 2014. 5. 13.


  






  식탁 하나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잠자리에 누우면 아담한 사인용 식탁이 떠올랐고그것을 중심으로 머릿속에 구체적인 그림이 활발하게 그려지곤 했다식탁에 우선 빨간 타탄무늬 식탁보를 깔고 싶었다.

  그 생각 속에서 수없이 갓 지은 밥과 노릇하게 구워진 생선향기로운 나물 반찬을 그릇에 담아 상을 차렸다식탁 중앙에는 애호박과 두부조갯살이 달싹거리면서 달궈진 된장 뚝배기에서 끓고 있는 안온한 시간내 옆자리에는 남편이 있고 아들딸과 함께 정담을 나누며 식사하는 장면까지 상상하면 뜻 모를 감동에 눈물이 났다그것은 식탁이라는 물건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매료된 후 내 기준으로 가장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었다편모슬하에서 유년을 그늘지게 보낸 탓인지 나는 어떤 지독한 결핍으로 굶주려 있었다.

  내가 어릴 적 시골에 사는 외삼촌댁의 재래식 부엌 한쪽에 식탁이 놓여졌다그에게는 노모와 아내열 명의 아이들이 있었기에 식구 수를 헤아린다면 식탁의 크기를 짐작하고 남을 것이다외삼촌이 손수 나무를 베어다가 견고하게 제작한 것이었다식탁의 나무 조각마다 각기 다른 나뭇결은 오묘했다물무늬 같은가 하면 중첩된 산봉우리의 불규칙한 흐름 같기도 하고비가 그리는 동그라미 같기도 했다외삼촌은 선해 보이는 얼굴에 키가 큰 남자였다그가 식탁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모습은 어느 평화스러운 작은 나라의 군주 같이 믿음직스러웠다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가시지 않는 식탁부엌문 앞까지 성큼 들어와 피어 있는 다홍빛 일년초들대화의 행간에 드나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그 포근한 풍경을 나는 잊지 못한다.

  자라면서 나는 사색적인 아이가 되어 더욱 고독해졌고가족들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온화하게 지켜보던 외삼촌의 미소가 절절한 그리움으로 남았다훗날 가정을 이루면 식탁부터 사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세월이 흘러 한 남자를 만났다그는 나와 다르게 여러 명의 형제가 있었고양친부모와 조부모까지 계신 반듯한 가정에서 자란 청년이었다거기에다 용모가 준수했고 여러 방면에 재주가 많았으며쌀 한가마니도 번쩍 들만큼 체력까지 좋아서 물 한 모금 없는 사막에서조차 나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이 듬직했다유년시절부터 집요하게 외삼촌의 모습에서 아버지의 허상을 쫓던 그 시린 빈자리를 그가 대신해서 채워줄 것을 확신했다.

  우린 서둘러 결혼을 했고 남매를 낳았다수없이 셋방을 전전한 끝에 어렵게 집장만을 했다나는 어느새 식탁에 빨간 타탄 무늬의 식탁보를 깔아놓으면서 세상에 부러운 것 하나도 없는 행복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그러는 사이 우리는 나이가 들어갔으며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해갔다.

  술을 즐기는 남편의 늦은 귀가로 저녁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남편은 공간을 넓게 쓰고 싶은지 식탁을 벽 쪽으로 붙였다따라서 의자 하나는 이방인처럼 집안에서 거추장스러운 천덕꾸러기로 떠돌았다식탁에서 의자 하나를 빼내는 순간부터 가정은 헐겁게 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도 자리가 부족해서 내가 뒤에 식사를 했다허구한 날 늦은 밤에나 들어오는 남편에게 아침 밥상머리부터 잔소리하다 말다툼을 하던 일도 드물게 되었다대화의 내용도 한정되었으며 서로에게 무심해갔지만 일신은 편했다대립에서 체념 쪽으로 기운 것이 성숙한 연륜에서 오는 줄 알았다.

  외삼촌처럼 온유하게 늙어갈 줄 알았던 남편은 오십이 갓 넘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렸다주변 사람에게 빚보증을 서준 것이 잘못되어가산을 탕진한 채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 병을 얻어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지난 사월장례가 끝나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임자 잃은 물건을 처분하는 것이었다그가 아끼던 옷을 골라 태우고 난 뒤의 남은 옷가지며 골프채낚시도구와 온갖 서류 뭉치가방과 구두들……한 사람이 살다간 흔적이 그렇게 거대한 줄 몰랐다.

  더 이상 없는 사람의 존재감이 무서웠고혼자만이 편하겠다고 먼저 떠난 배신감에 화가 났다헛된 야망에 밖으로 돌던 그와 불화했던 시간이 원망스러워서남아 있는 연민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남편의 물건을 재활용 수거함에 넣고 또 넣었다마대자루에 담긴 무거운 짐을 질질 끌고 도둑처럼 남몰래 다세대 주택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남루한 생애의 지리멸렬함에 울컥해졌다.

  그러한 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듯 어두운 거리를 빠져나왔다한 사람의 세상을 거리에 내팽개친다는 것이 금지된 행위를 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그의 물건만 버리는 게 미안해서 잘 입지 않는 내 옷가지와 아이들의 물건도 골라서 버리고나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그 많은 책들도 고물상을 불러서 가져가라고 했다.

  아들은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기에 딸과 단둘이 조그만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데 많은 살림살이가 버거웠다그 핑계로 멀쩡한 장롱이나 책상책장이나 진열장 따위를 미친 듯이 버렸다오직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어서 그땐 제정신이 아니었다이사하면서 인부들이 버릴 물건을 끌어내는데 식탁을 들고 나갈 때 감당할 수 없는 회한으로 눈물이 솟구쳤다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미안해……마음속으로 울부짖었지만 앞서 떠난 남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기도 했다.

  남편은 몇 년 사이 불의의 사고로 형을 잃고양친부모와 동생마저 돌연한 병사로 떠나보내야 했다울분과 고통을 홀로 삭여야 했던 그는 술자리를 사양하지 않았고취미생활을 한다고 밖으로 나돌았다심지어는 사업을 한다고 잘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었다그때 내가 조금만 더 현명해서 그 아픔을 감싸 안았더라면식탁을 안쪽으로 돌려놓고 남편을 따뜻하게 집안에 불러들였더라면아마도 가족들 모르게 남에게 빚보증을 서는 실수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그 식탁은 더욱 낡겠지만 우리 가족은 초연하게 깊어진 모습으로 그곳에 앉아서 식사를 하게 될 것을 단 한 번도 의심치 않았다평범하기조차 한 나의 바람은 이룰 수 없는 소망이었을까.

  얼마 전나는 분주하게 음식 장만을 하고 있었다조기를 굽고 쇠고기국도 한 솥 끓이고모듬전을 부치면서 갖은 양념을 넣어 조물조물 잡채도 무쳤다그리하여 정성껏 상을 차리고 아이들과 함께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초인종이 울리고 남편이 돌아왔다꿈이란 것이 대체적으로 모호해서 남편이 어디 먼 곳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는 것쯤으로만 알고 있다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그의 손을 덥석 잡고 맞이했고 단란한 분위기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사인용 식탁그것은 꿈속에서나마 온 가족이 재회를 하고남편과 내가 아직도 풀지 못한 앙금과 상처들에게 화해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글을  보내며


김채영 작가의 글을 읽고 있으면 참 잘 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감정에 휩싸이면 글을 분석하기는 틀린 것이죠.

사랑하면 눈에 콩깍지가 씐다고 하잖아요.

저는 사인용 식탁을 처음 읽었을 때 '아 좋다' 했습니다.

이 글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에세이스트의 편지를 쓰면서

'사인용 식탁'을 다시 읽습니다.

여전히 좋습니다.


식탁의 나무 조각마다 각기 다른 나뭇결은 오묘했다물무늬 같은가 하면 중첩된 산봉우리의 불규칙한 흐름 같기도 하고비가 그리는 동그라미 같기도 했다외삼촌은 선해 보이는 얼굴에 키가 큰 남자였다그가 식탁의 가운데에 자리 잡은 모습은 어느 평화스러운 작은 나라의 군주 같이 믿음직스러웠다싱그러운 나무 냄새가 가시지 않는 식탁부엌문 앞까지 성큼 들어와 피어 있는 다홍빛 일년초들대화의 행간에 드나드는 동물들의 울음소리그 포근한 풍경을 나는 잊지 못한다.


어떤가요? 좋지요?

김채영 작가의 문장은 밀도가 높습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을 모아 문장을 만들어 냅니다. 


나무결, 물무늬, 비, 동그라미, 얼굴, 평화, 군주, 믿음, 냄새, 부엌, 다홍, 일년초, 울음 소리, 나무결, 식탁, 대화,풍경,다홍....


엄청난 양의 명사들입니다. 그리고 단어들  사이의 의미의 거리는  멀지요. 김채영 작가는 이 단어들을  묶어 마지막 문장에서 "포근한 풍경" 이라고 했습니다. 저런 단어들이 포근한 풍경이 된다는 것이 신기하지요.  이것이 김채영 작가의 능력이겠지요,  부러운 재능입니다. 


김채영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수필 문장에 대해 다시 생각 합니다. 

김채영의 문장은 풍성합니다.

제 이야기는 이만큼만 하겠습니다.

김채영의 말들에 한번 빠져 보세요.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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