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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작은 꽃이 아름답다

by 안규수 2021. 10. 11.

 

   봄 햇살이 포근하다. 봄빛이 완연한 숲 사이로 정겹게 나 있는 산길을 따라 걷는다. 깊숙이 들어 마신 공기가 참 달다. 땀을 흘리면서 격렬하게 산을 오르는 것보다 솔바람 소리를 듣고 새싹이 움트는 나무를 바라보면서 걷는 길이 얼마 만에 맛보는 상쾌함인지 모르겠다. 지리산 종석대 아래 상선암에 오르기 위해 풀숲이 우거진 산길을 걷는다

  아득한 옛날, 중학교 3학년 봄 수학여행 때 화엄사를 출발하여 노고단을 거쳐 천은사로 내려오던 추억이 서린 그 길을 나는 지금 걷고 있다. 긴 세월 망각 속에 묻혀있던 소년 시절이 되살아나 만감이 스쳐 지나간다. 새들은 아직도 겨울잠을 자고 있는지 숲은 적막감이 흐른다. 발걸음을 정지된 시간이 느리게 따라오고 있다. 지난날의 감회가 봄 날 아지랑이처럼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그 시절 이 골짜기에서 저 아래 천은사까지 수령이 천년은 넘어 보이는 수천 그루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마치 오늘날 제주 영실 금강소나무를 연상할 만치 웅장하고 아름다운 숲이었다. 그 당시 천은사 주지 스님의 사리사욕이 이 천년 소나무 숲을 파괴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일은 당시 소나무 밑둥치에 깊게 파인 상처였다. 일제가 전쟁 말기에 연료로 사용할 송진을 채취하기 위해 저질은 만행이었다는 것을 뒤에 알았다. 어쩌다 도벌을 피하고 남아 있는 소나무에는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그대로 지니고 그날의 아픔을 증언하고 있었다.

  상선암이다. 신라의 도승 우번 조사가 젊은 시절 9년 동안 좌선 수도를 하던 중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에 이끌려 종석대를 향해 따라나섰다는 전설의 암자다. 무슨 일인지 암자의 문이 자물쇠로 굳게 채워져 있고 고요한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멀리 구례 들판 위로는 자욱한 구름이 휘감겨 있어 풍경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인다.

  암자 주위에는 노랑 토종민들레꽃이 화원을 이루고 있다. 황홀이다. 우리가 흔히 보던 샛노란 색과는 다른 연한 노랑꽃이다. 그 작은 꽃이 귀여운 모습으로 수줍게 피어 한껏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숲은 생명의 보금자리다. 나무 풀 야생화 등 제각각 다른 존재들이 한데 어울려 사는 곳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자연의 생태 모습이다. 그런 자연의 조화 속에서 모진 한파와 눈보라 삭풍을 견뎌 낸 민들레가 화사한 꽃을 피우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어 놀라웠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희고 노란색으로 예쁘게 핀 민들레는 메마른 땅에서도, 인적이 빈번한 길가에서도, 바위틈에서도 꽃을 피운다. 토종민들레는 개화기간이 4~5월경으로 짧지만, 서양민들레는 4~10월까지 긴 기간 동안 꽃이 피기 때문에 토종민들레보다 번식력이 왕성하다. 우리 주변에서 눈에 쉽게 띄는 민들레는 대부분 서양민들레이다. 토종민들레는 동종끼리만 혼인하여 순수한 혈통을 지킨다. 여러 종류이지만 모두 꽃 색이 연하고 몸도 가냘파 연약하고 다소곳한 느낌이 든다. 산이 높고 맑은 청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반면에 서양민들레는 꽃 색이 짙으며 꽃잎이 많고 소담스럽다.

토종민들레는 서양민들레의 꽃가루가 찾아와 애걸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자기가 원하는 꽃가루가 날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끝내 오지 않으면 기다리다 지쳐 처녀 임신을 해버리고 만다. 우리가 봄날에 보는 바람에 날리는 토종민들레의 꽃씨는 발아가 안 된 무정란 씨가 많다. 이 때문에 '일편단심 민들레'라는 말이 나왔다. 그 옛날 우리 여인들이 어쩌다 홀로 되면 평생 수절하는 풍습과 무던히 닮았다.

  반대로 서양민들레는 정조 관념이 없다. 근친이고 무엇이고 모두 받아들여 씨를 맺는다. 그러니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토종민들레는 근친 상간이 안되니 수효가 줄어들고, 거기에 민간요법으로 소화기 질환과 해독 해열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멸종 위기에 있다.

  토종민들레꽃은 작아도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춘 엄연한 우리 꽃이다. 이런 산골에서까지 어떻게 작은 꽃을 피울 수 있었을까? 이 첩첩산중에 벌과 나비가 찾아올까? 그날도 꽃밭에 벌과 나비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사실 꽃이 작으면 벌과 나비 같은 중매쟁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도 크고 잘 생겨야 좋다. 하물며 꽃일까. 중매쟁이들이 같은 꽃을 돌아다녀야 수정이 잘 될 텐데 꽃이 작아 수정 확률이 낮아 종족 번식에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 끈질긴 생명력은 이런 산골에서도 외롭게 이어지고 있다.

  작은 건 분명히 약점이지만 장점도 있다. 인적이 드문 산사라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을 피하여 이런 한적한 곳에 사는 즐거움은 그 밖에 모른다. 작기에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져 저들의 생명에 지장을 줄까 걱정이다.

  지리산 종석대 아래 암자에서 생명의 이치를 떠올린다. 작다고 꽃이 아닌 것도 아니고 예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식물의 생김새에 궁금증을 갖고 관찰하다 보면 작은 꽃 잎새에 이들이 살아온 역사와 사연이 보인다. 이는 고난의 역사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는 우리의 가난한 백성들의 기상과도 닮은 듯하다. 이렇듯 우리 토종민들레꽃은 작은 몸으로 세상을 넓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내 인생이 저 작은 민들레처럼 화려한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저 민들레꽃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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