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빛이 완연한 이른 아침 아내와 산책길에 나섰다. 아파트 쓰레기장에 고사 직전 화분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아내가 그 화분에 관심을 보여 집에 가지고 왔다. 다육식물로 보이는 화분을 우선 분갈이를 하고 영양제를 투여하는 등 정성으로 보살폈다. 지성이면 감천이듯 이파리에 생기가 돌면서 살아날 기미가 보였다. 일주일쯤 지나자 이파리 테두리가 점점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새싹들이 눈에 띄었다. 모두 하트 모양이다. 긴 겨울을 지나온 새순이 누군가의 첫사랑처럼 여리고 곱다.
그 식물의 이름은 호야, 동남아 등 열대지방에서 자생하는 다육식물로 별명은 ‘옥잠매’로 옥으로 만든 비녀라는 귀한 꽃나무였다. 거기에 ‘고독한 사랑’ 또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는 꽃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호야는 우리 집에 오기까지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래서일까. 긴 시간을 침묵했다. 인간의 배신에 절망하고, 죽음 직전까지 간 모진 삶의 애증 때문인지도 모른다. 식물도 사랑을 받은 만큼 돌려줄 줄 아는 것 같다.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반려 식물을 살피다 보니 식물은 공간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적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열악한 아파트 좁은 공간에서 난초 등 다른 화분과 함께 참고 잘 지내고 있었다.
올 3월 아내가 아침 화분에 물을 주다 숨넘어가는 소리로 나를 불렀다.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호야가 꽃망울을 여러 송이 머금고 있지 않은가. 무척 반갑고 기뻤다. 넝쿨 줄기에 솜털 보송보송한 꽃 몽우리가 생기면서 연분홍 별 모양 꽃잎 속에 8개의 영롱한 진주를 머금은 듯한 자줏빛 꽃술이 보였다. 한없이 가냘프고 청초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 단순하면서도 화려하고 한 점 티 없이 순수한 모습으로 방긋방긋 웃고 있는 듯 보였다. 참 오랫동안 준비한 것 같다.
가을이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일상이 멈춰 버렸다. 세상 모든 것을 한순간 바꿔 놓은 이변을 낳아 바깥나들이를 삼갔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니 생활에 염증이 생기고 답답해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 어느 날 창문을 여니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베란다의 호야가 내 눈길에 들어왔다. 아침에 물 줄 때는 꽃필 기미가 없던 호야 줄기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자라나고 있었다. 마치 우울한 내 마음을 위로해 줄 것처럼.
호야가 꽃망울을 터트렸다. 복스러운 꽃잎에서 초콜릿 향이 풍긴다. 꽃잎에 혀를 살짝 대니 달콤하다. 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꽃잎과 꽃술, 바람에 흔들리는 여린 부분들이 모여 이루어낸 조화가 아닌가 싶다. 꽃을 피우고 향을 내뿜는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널리 알려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함이다. 그런 호야를 찾아오는 친구가 없으니 안타깝다. 그런 일 아랑곳 않고 초가을과 봄에 꽃을 피운다.
호야는 물을 자주 주면 뿌리가 썩는다. 그렇다고 너무 물을 안 줘 시들해진 이파리에 애정을 보이고 물을 주면 금방 파릇파릇 살아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싱싱하게 만드는 묘한 힘을 갖고 있다. 아끼고 사랑해 준 만큼 기쁨을 주는 호야, 거기서 얻어지는 소소한 행복은 어떠한 가치로도 바꿀 수 없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꽃이 지닌 정서적 위력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자연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있다. 봄이 오기 전 난을 채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산속에서 헤매고 다닌다. 내가 기르는 난 화분도 자연에서 얻은 것이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임철호 수필가는 그의 신간 저서 ‘길 위의 정원’에서 이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길가나 정원에서 그들의 본향을 떠나 강제로 옮겨진 식물이나 꽃들은 ’자유‘가 없는 식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꽃은 인간에게 힐링과 마음에 위안를 주지 못하며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라고 피는 꽃이라야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진정한 힐링과 치유를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호야, 고향이 어디냐?”
햇살이 고운 오후, 화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물었다.
“내 고향은 먼 남쪽 나라에요. 하늘이 비취 같고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고, 푸른 바다 흰 모래 언덕이 있고 강물이 흘러가는 곳이에요. 벌과 나비도 있어요”
그의 말소리는 애처로워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럼 고향에 가고 싶으냐?”
“네, 네. 이런 좁은 공간에서 새소리도 없고, 바람도 없고, 친구도 없는 이런 곳에서 꽃을 피울 줄은 몰랐어요.”
“하늘이 보고 싶으냐?”
“네, 뜨거운 햇볕이 이글거리는 하늘 말이에요.”
“새소리가 듣고 싶으냐?”
“네, 물소리도요.”
“그럼 왜 여기 와서 꽃을 피우니?”
“그건 내 운명입니다. 아무 데서도 꽃을 피워야 하는 내 슬픈 운명인걸요. 그래서 밤마다 혼자 울기도 해요.”
나는 호야에 사랑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나의 사랑과 관심에 만족한 줄 알고 있었다.
“사랑이란 잔인한 것이로구나.”
무심히 어디론가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며 탄식이 흘러나왔다.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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