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추위도 잊은 채 겨울 요정들이 나풀거리며 지상으로 내려옵니다. 온 세상이 순백의 세상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것은 하얀 눈 속에 깊이깊이 묻힌 채, 조용히 엎드려 있습니다. 시기와 증오, 미움과 욕망, 마음속 모든 악의 근원들도 이 순간만은 모두 사라집니다. 아마도 하늘의 천사들이 오염된 지상에 내려와 정화작업을 해서 그런가 봅니다.
모처럼 고향 가는 날, 길이 얼어붙어 차는 거북이처럼 기었지만, 문득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들뜨고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린 시절 겨울의 아침은 아버지의 빗자루로 눈 쓸던 소리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도 잠시뿐 대문을 열고 골목을 빗질하시면 마당은 어느새 함박눈이 다시 점령한 뒤였습니다. 강아지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아버지 뒤를 껑충껑충 뛰어다니고, 담배 연기 같은 콧김을 날리며 쉬지 않고 집 아래 샘 길까지 빗질을 해댔습니다. 엄마는 아버지 비질 뒤를 따라 물동이를 이고 샘터로 향합니다. 초가지붕 굴뚝에선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습니다. 아득히 먼 옛날 정겨운 농촌 풍경입니다.
학교로 들어가는 긴 방죽을 끼고 흐르는 벌교 천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 다리를 벌벌 떨면서 건너다니던 시절이 생각납니다. 낙안벌에서 열두 방천을 거친 세찬 골바람이 그때는 무척 매서웠거든요.
차가 많지 않던 어린 시절에는 눈이 많이 내려도 세상은 고요했습니다. 깊은 밤 방안에서 귀를 기울이면 장독대에 사락사락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밤이 깊어 출출해지면 엄마는 동치미를 곁들인 고구마를 밤참으로 들였습니다. 그리고 난롯가에서 장화홍련전이나 심청전 등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를 맛깔나게 들려주시면 나도 모르게 잠이 들곤 했습니다.
눈 내리는 날 학교에 가는 길은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과 손을 호호 불면서 눈싸움도 하고 학교 운동장에서 눈사람 만들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 오릅니다. 가난해서 먹을 것, 입을 것이 부족한 시절에 함박눈은 풍년의 약속이자 기원이었습니다. 눈은 들과 산에 봄이 올 때까지 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해빙기가 되면 눈과 얼음 녹는 물이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고 그곳에서 또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 냉이와 달래가 그 귀여운 모습을 내밉니다. 눈에 덮인 마을, 그것은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요즘 남쪽에는 옛날 같은 함박눈은 보기 어렵습니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은 설경은 동화 속 이야기가 된 지 오래입니다. 어쩌다 싸락눈이 내려도 금방 녹아 사라집니다.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맛은 강설에 있습니다. 겨울이 깊어가면 산야가 온통 흰 눈에 덮인 세상은 옛 이야기 일 뿐입니다.
요즘 날씨는 예전과 달리 엉뚱한 데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보가 틀렸다고 기상청을 탓하지만, 과학의 눈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이 된 모양입니다.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지구 온난화 현상은 이제 인류의 재앙이 되어버렸습니다. 북극의 빙하가 무서운 속도로 녹아내리고 아프리카 케냐의 국립공원 안에 있는 동물들의 젖줄인 투르카나호수가 가뭄으로 말라가고, 한라산 구상나무도 말라 죽어간다는 이야기이고 보면 하나뿐인 지구는 몸살이 아니라 중병에 걸린 것이 분명합니다.
그 무렵엔 눈이 웬만큼 쌓여도 대란은 없었습니다. 폭설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듣지 않았습니다. 눈은 지상의 모든 것을 덮음으로써 그것들을 하나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만들기에 그것은 꿈꾸는 유토피아였습니다.
옛집에 들어서니 그 시절의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아버지의 재떨이에 담뱃대 터는 소리도 들리고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밥상 차리는 엄마의 숨소리도 들리는 것 같습니다. 이제 모두 가고 감나무만이 쓸쓸히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나를 반겨줄 어릴 적 동무는 동네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수년 전에는 객지에서 죽어도 고향에 뼈를 묻었지만, 지금 죽어도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화장 덕분입니다. 홀로 집을 지키고 있는 할머니의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간간이 들려 옵니다. 저 기침 소리도 머지않아 아련한 추억 속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모처럼 내린 눈이 골목길에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이제 눈이 내리면 동네 사람들은 걱정이 앞섭니다. 골목에 쌓인 눈을 치울 젊은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의 눈은 자연 일부로 바라보고 즐기는 대상이었지만, 이제는 생활에 불편을 가져다줄 뿐입니다.
마을 사람들이 복작대던 골목은 이제 적막강산이나 다름없는 모습입니다. 김이 무럭무럭 솟아나는 가마솥국밥의 구수한 냄새가 사라진 마을은 무미건조하고 삭막합니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왔을까요. 동무들과 골목을 누비던 그 시절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습니다. 비록 가난했지만 정겹고 삶에 여유가 있었던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담장에 기대어 빈집을 지키고 있는 저 초라한 겨울나무,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