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설날 고향을 찾았다. 마을 어귀에서 뒷산을 바라보니 잿몬당 소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오랜 기간 마을의 역사를 몸에 새기고 있는 소나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부모님 가시고 형 누나도 다 세상을 등지고 그 소나무마저 베어지고 없다.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불현듯 어떤 격정이 엄습해 왔다. 칠십여 년 전의 여순사건 비극의 진상이 아직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누가 그날의 비극을 증언할 것인가. 그때 나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해가 질 무렵에 집 앞 도로에서 놀고 있을 때 저만치서 군인들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군인들이 우리 집 앞에서 가마니를 덮은 들것을 내려놓았다. 들것에는 총을 맞아 피범벅이 된 반란군이 실려 있었다. 소란에 놀란 엄마가 집에서 부리나케 나오셨다. 그는 엄마에게 손짓하며 신음했다.
“물, 물!”
엄마는 샘물을 한 바가지에 떠서 그에게 먹였다. 엄마가 그에게 무어라고 한마디 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얼른 내 손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때가 여수․순천 사건의 막바지였고 군인들은 징광산에서 준동하는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이었다.
1948년 가을 어느 날, 아버지는 들일을 하다가 느닷없이 벌교 쪽에서 콩 볶듯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었다. 여수 순천을 삽시간에 점령한 반란군이 ‘해방군’을 자처하며 벌교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벌교를 점령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우익인사 처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 중도가 벌교 철다리 밑 개펄에 방죽을 쌓아 간척지를 만들었다. 해방되자 중도는 그 땅을 지주들에게 헐값에 팔았다. 가만두면 저절로 우리 소유가 될 것을 돈을 주고 사들인 지주들의 속내는 따로 있었다. 나중에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피땀 흘리며 노동을 팔아 만든 그 농지가 내 논이 될 줄 알았던 농민들은 또 소작농이 된 것이다. 그들의 피 맻인 억울함을 하소연할 곳 없던 농민 일부는 반군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반란군이 소위 반동분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마을 유지들과 지주들, 그리고 군인과 경찰 가족이었다. 세상이 바뀌자 그들은 이성을 잃고 지주들과 지주들 밑에서 거들먹거리든 사람들, 평소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벌교 남 초등학교 교정에 모아 놓고 소위 인민재판을 열었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는 대문 밖에서 붉은 완장을 찬 낯선 청년들에게 연행당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읍내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끌려와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잎이 갈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운동장 가에는 끌려온 이들의 가족과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아버지를 뒤따라온 엄마와 작은누나도 그 군중 속에 끼어 가슴 조이며 구경꾼에 섞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 유행어는 ‘손가락 총’이었다. 운동장에 잡혀 온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붉은 완장을 찬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곧바로 끌려 나갔다. 사람의 손가락이 바로 총구멍이나 다름없었다. 손가락 총을 당한 사람들은 새끼줄에 묶인 채 한 사람씩 교단 앞에 세워졌다. 곧이어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간부인 듯한 사람이 호명하면서 죄목을 열거했다.
“이 사람은 인민을 수탈한 인민의 적이요, 처단해야 하오.”
이렇게 운동장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소리 지르면, 기다렸다는 듯 앞자리에 포진한 몇 사람이 옳소, 옳소, 손들고 손뼉 치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한 사람을 처리하는데 삼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선고가 모두 끝나면 사람들은 곧바로 굴비 엮듯 묶어져 소화다리(부용교)로 끌려갔다. 소화다리 난간에 일 열로 세워 놓고 발목에 새끼줄을 묶은 뒤 방아쇠만 당기면 다리 밑으로 사라졌다. 다리 아래 갯바닥에는 시체가 질펀하게 널렸고, 바닷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다리 양쪽에 둘러선 가족들의 통곡에 하늘도 슬피 울었다.
아버지는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용케도 살아남으셨다. 지주는 아니어도 괜찮은 살림에 머슴까지 둔 마을 유지가 저승사자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아버지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하셨다.
“그 무신(무슨) 사람 못 할 일이여, 그땐 영축웂이(영락없이) 죽은 목숨인 줄 알았제, 살아있는 것이 꿈이다. 그러니 느그들 걱정뿐이더라고. 나 죽으면 짠한 느그들 어쩌고 살 것이냐.”
방죽에서 이 처형 광경을 직접 목격한 엄마는 후에 이렇게 말했다.
“눈 뜨고는 못 봐. 발목이 묶인 시체가 다리 밑으로 뚝 떨어지면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어야. 아이고! 이런 시상이 어딧냐, 생지옥이여 생지옥!” 하시며 치를 떨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그렇게 죽는 모습을 바라본 여인들은 혼절했다. 주위에 어둠이 짙게 깔리면 가족들은 다리 밑 시체를 수습해 집으로 모셔 갔다. 낮에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그들은 한밤중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상여도 없이 장사를 치렀다.
그날 인민재판에서 아버지가 무사할 수 있었던 건 작은 매형의 힘이었다고 한다. 매형이 반군에 합류할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를 살려낸 것이다. 파죽지세로 밀리던 전세는 얼마 못 가 급반전되었다. 벌교를 거쳐 보성 쪽으로 진출한 반란군은 군경 토벌대에 쫓겨 우리 마을 뒷산인 징광산으로 숨어들어 저항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압에 성공한 토벌군과 경찰들에 의해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경찰은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과 죄 없는 그들의 가족들을 죽였고, 자의든 타의든 부역했다는 죄목만 붙여 누구든 가차 없이 처단했다. 그때 마을 사람들은 반란군을 ‘산 사람’이라고 불렀다.
밤과 낮의 주인이 바뀌었다. 밤이면 산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젊은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낮에는 경찰들이 마을로 들어와 식량을 약탈당한 사람들을 부역했다는 죄목을 부쳐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 혼란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그들은 두 주인에게 순종하면서 갈대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자칫 한쪽에 밉보이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오직 맹종만이 힘없는 백성들의 살길이었다.
그때 동네 남자들은 밤이 되면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모두 읍내 학교로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와야 했다. 당시 경찰은 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소개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오후가 되면 서둘러 형과 작은매형을 데리고 읍내로 나가셨다. 작은매형은 우리 집에서 머슴 살다가 작은누나와 눈이 맞아 데릴사위로 살고 있었다. 신혼인 매형은 임신한 누나를 두고 산사람들에게 합류할 수가 없어 결국 반동분자로 지목받아 살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봄이었다. 어느 날 밤 작은 매형이 감기·몸살로 집에 있다가 이웃의 밀고로 산 사람들에게 붙들려갔다. 그들은 매형을 뒷산 잿몬당 소나무 밑으로 끌고 가 인민재판을 열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날 밤 매형은 죽창으로 무참히 처형 되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스물다섯 청년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날 밤 동네에서 매형과 함께 끌려간 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어둠이 깔린 처낙골 낭떠러지로 몸을 날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가 그날 밤 진상을 아버지에게 소상히 전해 줘 매형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이 전란으로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그들의 죄목은 알 수 없다. 죄란 무엇이었을까. 무자비한 총과 폭력 앞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나약함이 죄였을까?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 이념의 파고는 아무 죄 없는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삼켜버렸다.
총이 곧 법이었다. 원한과 복수가 그 총을 들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던 세상에서 누군가의 심장을 구멍 낸 총알은, 시간이 지나 총을 쏜 그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혼돈의 아귀다툼 속에서 좌. 우 모두 미쳐 날뛰던 그때,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죽여야 했던 당시의 그들을 누가 단죄할 것인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늘 죄 없고 힘없는 백성을 가장 먼저 짓밟는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핏빛 전란이 끝난 뒤 관에서는 주민들을 동원하여 반란군이 다시는 준동할 수 없게 징광산의 울창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남김없이 베어내 민둥산으로 만들었다. 봄빛이 완연한 징광산 자락에는 참꽃이 붉은빛을 토하며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잘려 나간 소나무그루터기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몸서리쳐지는 학살의 현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망각의 늪에 빠진 채 평화로웠다.
산사람들은 양민들을 처형한 뒤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돌무덤을 만들었다. 후에 유가족이 찾기 쉽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였다. 아버지와 엄마, 누나는 소등처럼 길고 둥그런 능선을 따라 수십 기가 널려 있는 그 많은 돌무덤을 일일이 헤쳐보고 다시 쌓길 무려 열흘 만에 매형의 유골을 찾아냈다. 이미 시신은 육탈 된 뒤였지만 옷가지와 금니 두 개의 유물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작은누나는 남편의 시신을 찾은 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 걸핏하면 남편이 최후를 마친 잿몬당 소나무 아래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별의별 좋다는 약은 다 써 보고, 신랑의 원혼이 씌웠다고 씻김굿도 하고, 당 골래 굿을 해도 차도가 없었다. 부모님의 애간장은 타들어 갔다. 삼 년여를 그렇게 앓던 누나는 스물넷 젊은 나이에 두 살 어린 딸을 남기고 기어이 남편 곁으로 갔다.
아버지는 음식을 끊고 술만 드시면서 두문불출했다. 술이 거나하면 신음처럼 토하시던 한 마디에 식구들은 먼 산만 바라보고 한숨만 쉬었다.
“놈(남) 탓할 것 없어, 모두 다 내 탓이제.”
그날 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책장 서랍에 간직해 둔 아이들이 학교에서 받아 온 상장보다 더 소중하다. 아버지는 왜 그걸 당신 탓으로 돌리고 만 것일까? 분노보다 먼저 체념을 익혀야만 하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의 생존법인가. 근대사의 격랑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질곡은 참으로 가파르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의 탄식은 체념 어린 침묵으로 변해서, 그 불모 한 시대의 울분을 장강대하의 술로 달랬다. 고통이고 형벌인 그 기억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셨으리라. 오직 침묵과 체념만이 그나마 남은 가족을 지키고 당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놈한테 신세지지 말고, 척(원수) 지지 말어.”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힘없고 이름 없는 민중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제의 이웃에게 죽임을 당하고, 믿고 의지해야 할 사람들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매형을 밀고한 이웃은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으니 그 배신과 분노는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걸 따져볼 길조차 없는 무기력에 대한 절망은 또 다른 분노이며 공포였을 것이다.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이유 없이 모두가 버려진 자, 저주받은 자들이었다. 옛날부터 민초들이 즐겨 불렀다던 청산별곡! 그 노랫말은 마치 이러한 가혹한 역사를 오래전부터 예단하고 있었던 듯싶다.
‘어디로 던지려는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고,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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