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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하나님, 저 이대로 망하지 않죠? 하나님, 저 이대로 무너지지 않죠? 저 다시 일어날 수 있죠?

by 안규수 2022. 12. 30.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겨울 나무 만큼이나 앙상하고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주변은 풍성하고 넘쳐 부족함이 없어보이는데.. 주변과의 비교가 더 힘들게 합니다. 
아이의 문제일 때는 더 힘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날에 수없이 했던 고백인 ‘이 아이는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그 고백이 
힘들고 어려울 때 그 때 우리 입술에서 진정으로 드려지길 원합니다. 
 
‘주님, 이 아이의 참 아버지는 주님이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등산을 좋아하는데, 특히 겨울 등산을 좋아한다.
우선 겨울의 찬 공기가 좋다. 
나는 겨울에 등산할 때 옷도 일부러 두껍게 입지 않고 조금 가볍게 입는다. 
처음 산에 오를 땐 춥고 으슬으슬하다가 한 5분 정도만 지나면 내 몸에서 놀라운 에너지가 발산되는데, 
그럴 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 추운 날씨에 찬 공기에 맞서 열을 발산하는 내 몸을 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내가 겨울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가 또 있다.
나는 겨울 산에서 나목(裸木)을 보는 게 참 좋다. 
사람들은 4,5월에 꽃이 만개하는 향기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나는 벌거벗은 앙상한 겨울나무가 5월의 화창한 꽃나무보다 훨씬 아름답게 보인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1월 동토에 뿌리내린 겨울나무가 참 초라하다. 
멋 부리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오직 겨울나무가 원하는 본능은 딱 하나다. 
생존하는 것. 버텨내는 것. 
그 하나를 위해 아름다웠던 잎사귀 다 떨어내고 벌거벗은 몸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이렇게 초라해진 겨울나무가 내 눈에는 왜 그토록 아름답게 보이는가? 
그 나무가 그렇게 겨울을 버텨냈기 때문에 5월에 아름다운 향내 나는 꽃잎들이 가능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로 그렇게 힘든가? 
지금 창세기 14장에서 아브라함이 겪고 있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빠져 있는가? 
그 힘든 과정을 견뎌내고 있는 과정 자체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가끔 청년들이 나를 찾아와 상담을 요청한다. 
각기 사연은 다르지만 그들이 겪고 있는 내용은 꽤 심각하다. 
언젠가 내가 잘 아는 한 청년이 찾아왔다. 
많은 아픔이 있던 청년이었다. 
우울증 약도 먹고 있다고 했는데, 나와 이야기하면서 막 울었다.

“목사님, 또래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보면 제가 너무 뒤처지는 것 같아요. 
전 그저 숨 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너무 초라해 보여요.”
그래서 내가 겨울나무 이야기를 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니? 내가 보기에 너는 진짜 아름답다. 
그 어려운 삶의 과정을 이렇게 잘 버텨내고 있는 것, 이 이상 어떻게 더 아름다울 수 있겠니? 
껍데기만 보는 사람들의 기준과 판단에 흔들리지 마라. 
겨울나무 같은 이 과정을 잘 견뎌내되,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꽃이 필 5월의 봄날을 기억하거라. 
그날을 소망하고 비전을 가지면 반드시 인생에 꽃이 필 날이 올 거야. 그것을 삶의 소망으로 삼으렴.”

나는 아브라함이 칠십오 세 때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받은 이후로 
아들 이삭을 응답으로 받던 백 세가 될 때까지의 과정이 고통의 과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내내 고통 속에 있다가 하나님의 응답으로 아들 이삭을 낳던 백 세 때부터 행복해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비전을 받던 칠십오 세 때부터 내내 행복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전으로 이어지는 믿음은, 환경을 보지 않고 꿈을 보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벼텨낼 수 있는 힘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소망 때문이다. 
믿음에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이십 대 초반에 시카고에서 고생하던 때가 또 떠올랐다. 
나는 지금도 미국을 방문할 때면 시간을 내어 고생스럽던 그 시절에 내가 살던 작고 초라한 집을 찾아가 보곤 한다. 
265불짜리 좁은 방, 삐걱거리는 백 년 된 목조건물, 바퀴벌레가 출몰하던 그곳에서 스물세 살의 내가 겪은 시카고의 겨울은 초라했다.

내가 이때의 얘기를 설교 때나 책에서 자주 하다 보니, 형제들의 입장이 곤란해졌었다. 
막내가 그렇게 고생할 때 형제들은 무엇을 했냐는 얘기들을 하기 때문이다. 
그건 오해다. 
그때는 내 가슴이 뜨거웠을 때였던지라 도와주겠다는 것을 다 거절했었다. 
내가 왜 아버지도 아닌 형제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느냐는 생각에, 
내가 벌어서 학교 다니고 생계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걸 ‘사서 고생한다’고 하던가?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사서 고생했던’ 그 당시의 나의 결정은 참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하니까 내 생애 가장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그 과정이 나에게 너무나 유익했기 때문이다. 
고생이 많아 수시로 마음이 무너지고 절망했던 시절이었지만, 
그때만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으로 가슴이 뜨거워졌던 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절망이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 저 이대로 망하지 않죠? 하나님, 저 이대로 무너지지 않죠? 저 다시 일어날 수 있죠?’라고 
기도하며 주먹에 힘을 쥐던 그때가 그립다.

<오늘, 새롭게 살수 있는 이유> 이찬수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미국의 조지 윌슨(George Wilson)이라는 남자가 우체국에서 사람을 죽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윌슨은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주변 사람들은 사고가 정당방위였다는 증거를 찾아 대통령한테까지 탄원을 했습니다.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앤드류 잭슨(Andrew Jackson)은 탄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 ‘특별 사면장’을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윌슨이 사면을 거부했습니다.
대통령은 발급한 사면장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이 문제를 연방 대법원에 넘겼고 대법원장 존 마샬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습니다.
“죄수가 사면을 거절했다면 사면장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사면장은 한낱 종이에 불과하기에 그 효력은 받는 사람이 수락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당시 이 사건은 ‘윌슨 대 미국’이라고 불리며 큰 이슈가 됐습니다.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사면 받을 수 있는 기적을 스스로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는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모든 인류가 구원받을 가장 완벽한 계획과 은혜와, 주님께서 우리 대신 죄의 대가를 치렀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저절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놀라운 기쁨의 소식을 서둘러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십시오. 아멘!

주님, 믿음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하게 하소서.
구원주 주님을 믿음으로 예비하신 영생과 축복을 누립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