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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기도하는 존재 / 배정인

by 안규수 2014. 6. 12.

  어느 시인지망생에게 운문이 안되면 산문을  보는  어떻겠냐고 했더니,  쓰다 안되면 소설 쓰고, 소설 쓰다 안되면 수필 쓰는  아니냐고, 되물음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수필가 S씨는  이야기를 내게 하면서 존심에 댄싱 간다 했다. 내가 한마디 얹었다. 맞는 말을 했는데  그러시오.

 사실, 문학 소년, 소녀 치고  이십 대에       사람이 어디 있으며  삼십 대에 소설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든  시기에는 시인이며 몽상가이며, 이상향을 그리는 소설가로 산다. 그러나   수필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만약에  쓰다 안되어 소설 쓰고, 소설 쓰다 안되어 수필을 썼다면, 소설 쓰다 안되어 수필 쓰고, 그도 안되어 시를 쓰게 되었다면, 그런 작가야말로 제대로  작가가 아니겠는가. 그러한 방황이 인생이요, 자기를 찾아가는 수련의 길일 터이니, 그것이높은 산을 만드는 문학의 뿌리가  것이다.

 피천득 선생은 영문학자며 시인이었다. 그러나 그분은 오늘날 우리 곁에 수필가로 남아 있다. 마흔을 넘어서는  쓰기를 계속하지 않고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자기인생과 문학이 시라는 문학형식으로 결실되기에는 걸맞지 않음을 느꼈었으리라 추측한다. 차주환 선생은 말하였다.시를 쓰던 윤오영 선생은 나이  둘에야 수필가가 되었다. 시인 윤오영은 몰라도 수필가 윤오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분들의 수필작품이 인구에 회자되는 이유는 수필보다 시가 향기 높은 장르거나 수필이 시보다 쓰기 쉬어서는 결코 아닌 것이다.

 문학은 인생이다. 인생에 있어, 십대, 이십 대가 성취를 위한 공격시기라면 삼십 대는 전진을, 사십 대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의 능력을 헤아리는 시기이다. 문학도 그렇다.  이십 대는 시요, 이삼십 대는 소설에 해당된다. 반짝이는 감각의 직관에 의하여 참신한 시가 되고, 소설의 주인공은 십 대가 거의  차지하고 있는  보면, 알쪼다. 수필 말마따나 서른 여섯  중년 고개를 설핏 넘어서면 인생은 수필이 된다. 이것은 단순히 연령의 문제가 아니다. 오고 감에는 이치가 있음을,  오묘한 이치를 헤아리며 존재의 의미를 터득하려는,  들기이다. 비로소 사람이 되려는 것이다.

 흔히들 수필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솔직하게   이해한다. 생각나는 대로  가는 대로 쓰면 되는  오해도 한다. 하지만 그건 문학 이전의 것이다. 문학 이전의 것은 수필이 아니다. 정말이지, 그렇게 써서 되는 글이 수필이라면 얼마나 편한가. 편한 글쓰기는 꽃뱀처럼 달콤하다.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도리질을 해댄다. 도리질을 한참 하다보면,  껍데기만붙들고 끙끙 앓는 나를 보게 된다.

 문학작품은 창작되는 것이다. 보고들은 것을 늘어놓는  아니다. 나는 만든다. 작품에 제목 달기는 아이들 이름짓기 만큼이나 어렵다. 뗐다, 달았다,  번을 고쳐 짓는지 모른다. 이름 짓기가 끝나면  됨됨이를 의심한다. 네가 수필이냐? 다시 물으면부끄러워 돌아서는 놈이  많다.  넉살좋게 배실거리는 놈이 있으면, 웃음 앞에서 나는   그리 약한지 모르겠다. 그만 채근하던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럴  수필가라는 이름표를 떼어 책꽂이 틈새에다 슬그머니 넣어둔다. 그리고는 서녘하늘에  조각달을 쳐다보며 혼자 서글퍼 한다.

 아, 너는 어디 있느냐. 내가    변변히  짓는 이유가, 보고들은 것을 생각나는 대로 갈겨놓은 잡문들이 수필로 변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는 요놈의 세상 때문이라고, 선무당 장구 나무라듯이, 원망 섞인 탓을 해보기도 한다.

 

 

어제가 오늘의 목숨을 조달한다. 인간은 어제를 주고 내일을 산다. 언젠가부터 어제가 금이 떨어졌다. 곶감 빼먹듯이,  어제가 동나기 시작했다. 부득이 빚을 낸다. 하지만, 마냥 공짜로 내일이 얻어지던가. 아니다. 갚아야 얻어진다. 어제  빚을 갚아야 내일 갚아야  빚을 오늘 얻게 된다.  지지 않게 되기를 소망하면서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시나브로 지게 되는, 죽는 날까지도 나의 빚 갚기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승에서 갚지 못하는 것을 저승에서  갚아야 한다면, 골머리깨나 썩힐게 분명하다. 그런데    덜어내기가  이렇게 힘에 부치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누구나 소망하는 바가 있다. 설사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뜻하는 바가 이루어지기를 바람은 누구에겐가 기원하는 것이다. 인생은 기도의 연속이다. 아마도 목숨은 기도로 부지될 것이다. 어제의 기원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오늘에 알면서도 내일을 위하여 기도하며 사는 것이 인간이다. 의식하든  하든, 기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 그게 삶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문학도 그러하다.

 나의 글짓기는 기도하는 행위이다. 기도에는 기원이 들어있다. 기원은 응답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의 기도는 감히 응답을 바라지 않는다. 응답을 주면 받고 메아리가 없어도 섭해 하지 않는다. 나의 기도는 게으르고, 뿌린 만큼 거두게 되는 법임을모르지 않아, 그냥 호소만 한다. 지금까지 나의 생명을 부지케 하였으며 생각을 가다듬게 하는 빛과 바람과 물과 이웃들의 아린가슴을 보일 뿐이다. 옹이 박힌 영혼에 자유를 기구하면서도 떼쓰지 않는다.  눈을 감고 숨을 모은다.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한다. 어쩌면 나의 그런 기도는 목숨을 빌려준 그분에게 하는 하소연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가 나의 기도를 듣는지, 그분이누구인지 나는 모른다. 그저 누구에겐가, 간절한 심사를 털어놓을 뿐이다.

 나의 수필 짓기는 숨쉬기이며, 영혼의 소생을 위한 기원이며, 존재 찾기이다. 하여, 나는  안개에 젖고, 나의 글들은 는개에젖는다. 언젠가는 소리 없이 소멸되고 말리라는 예상을 하면서, 기도하는 존재를 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