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창작 기법’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글쎄다’하는 생각을 했다.
이 시대에 와서,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다고 우기는 수필가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수필은 창작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시는 아무나 쓸 수 있다. 소설은 아무나 쓴다. 평론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어느 시인 소설가 평론가가 이런 말을 하는가? 그런데 수필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이름난 수필가가 떠들어댄다. 이것은 문예창작의 영역에서 보면 ‘기법’이 없음을 공인하는 셈이다.
‘보고 듣고 생각한 것을 진솔하게 쓰는 인격적인 글’임을 주장하면서 한 세기가 되도록 그렇게 가르치고 지금도 그렇게 영역을 지켜오는 한국 수필문단의 풍토는 매우 보수적이고 배타적이다. 이러한 문단의 행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수필잡지들이라 할 수 있다. 끼리끼리, 자기네들끼리 모여서 자찬을 갈라먹으며 즐긴다. 그러느라 ‘수필’이 아닌 ‘수필가(?)’를 양산해서는 입원실에 모인 환자들처럼 서로 덕담을 하며 자기 도취에 빠져 산다. 이런 병폐는 그 중심에 수필은 없고 수필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수준보다 작가의 이력이 우선하는 판에서 누가 문예적 진로에 대한 고민이나 새로움에의 추구를 애터지게 하겠는가. 따라서 작품연구와 제작에 치열을 바치지 않는다. 더욱이 기법이나 사조를 들먹이는 일은 아예 없다. 그러므로 수필의 풍토는 오히려 비실험적이고 비창작적이다. 예술의 젖줄을 부정함으로써 세대간에서도 차별화되는 방향의 제시가 도모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에다 덕담을 굳이 한다면 ‘내용을 중시할 뿐 형식은 그닥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인격주의를 주장할 것이다. 표의주의의 핵심이 의미의 전달일진대 기법이 무슨 소용인가하고 말이다.
현 수필의 이런 실정과 수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수필시대’에서 새삼 창작기법이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는 ‘반성’과 ‘추구’를 동시에 촉구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듯 하여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이 질문을 받은 사람들은 뭐라 할까, 그도 궁금하다.
예(藝)가 문화가 되면 생활이 된다. 예는 창조되고 문화는 창조를 모방한다. 생활은 문화의 보편된 활용수준이다. 창작은 당연히 예술의 영역에 들었을 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수필의 중심축을 예술의 영역에다 이동시켜놓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아가서 문화생활의 영역을 헤집고 다니는 기록수필은 난외에 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수필에서 경험사실을 아름답게 분칠하는 것을 창작의 정석이라 우긴다면 이는 무지하다고 할 밖에 없고, 그런 수필이 주인대접을 받는 풍토에서는 새로운 기법의 실험이나 발전은 물론 수필의 위상도 보장 받을 수 없음은 뻔하다.
굳이 창작기법이라 할 것도 없겠지만 나는 경험사실을 ‘진솔하게’ 안 쓰려 한다. 경험에서는 대상을 선택할 뿐이다. 그 텍스트는 여러 가지 메스를 써서 해체하고 해체된 부품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여 그 본래의 성격이나 성질, 그가 지닌 생존의 역사에다 왜를 삽입한 의문부호를 던져 ‘아’가 나올 때까지 절구질을 한다. 여러 가지 해석을 통하여 가치 있는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야콥슨의 말을 빌린다면 ‘잠언’ 즉 ‘선택의 축’을 완성하는 작업이다. 이런 지적 유희는 대단히 즐겁다. 천차(千差)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사실 이런 작업은 누구나 한다. 기사가 아닌, 이른바 ‘작품(?)’을 쓴다면 말이다. 일반적으로 ‘의미부여’가 되면 수필이 다 된 걸로 여기는 모양인데, 잠언이 못 되는 의미는 있으나마나다. 또한 이 작업은 창작이 아니다.
어떤 대상을 해석해서 얻은 명제를 주제로 하여 독자를 설득하려는 의도를 표출하는 것은 ‘무엇은 무엇이다’를 해석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해설하는 데서 그치면 그것은 독자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설명이 된다. 되도록이면 나는 이 설명을 제거한다. 그래야 창작이 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대상에서 사색된 선택의 축, 즉 잠언을 얻은 다음에야 창작의 고뇌를 앓는다. 이제는 ‘무엇으로’라는 결집의 축을 만들어야 하는 때문이다. 그러러면 ‘가치 있는 의미’, 즉 그 잠언이 살 새로운 집을 짓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닌 ‘사건’을 결합하는 작업을 하는 데 이 건축물은 종류에 따라 그에 맞는 기법을 찾아 쓴다. 왜냐하면 그 잠언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꼬투리에 따라 지어야 할 집이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인가, 철학인가. 윤리인가, 신학인가. 미학인가 등등, 해석하는 도구에 따라 표현되는 대상이 내 경험사실과는 다른 형상을 하고 다가온다. 그러므로 잠언의 대상이었던 <깃발>이 표현의 대상이 되었을 때 형상되는 건축물은 바퀴벌레도 되고 비행기도 되고 잠수함도 되고 집도, 나무도, 인간도 된다. 한편으론 현실스럽거나 신비스럽거나 한 새로운 사건으로 결합한다. 이 상상의 도가니에서는, 잠수함을 만드는 것과 나무를 만드는 것과, 사실과 신비를 창조함에 있어 그 기법이 같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나는 수필을 디자인한다. 그것이 구조기법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경험사실에서 대상을 찾고 그걸 해석해서 잠언을 얻고 잠언에 어울리는 집을 디자인하고 그 디자인에 맞게 설계하고 자료를 구하고 그 재료를 설계에 맞도록 재단을 하고 그런 다음에 건축을 한다. 집을 다 지었는데 디자인 한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으면 몇 번이고 다시 수정한다. 물론 디자인이 바뀌는 때도 있다.
암튼, 내가 가장 심혈을 부리는 연금술은 디자인이다. 디자인이 창작의 시작이요 끝이기 때문이다. 이 미(美)에의 작업은 전투이다. 아주 치열한.
‘이봐, 그 힘들고 귀찮은 짓을 왜 해?’ 한참 전투를 벌이고 있노라면 나를 집적거리는 놈이 있다. 상상의 고뇌를 싫어하는 그놈은 늘 그런다. 집을 지을 필요가 없다. 남이 지어놓은 옛집에 들어가서 벽지나 새로 바르고 전등이나 갈고 외장을 좀 손질해서 자기 문패를 달아놓으면 된다. ‘이봐, 이렇게 손질해서 꾸며 놓으니까 얼마나 좋나!’ 그러면 또 한 놈이 그런다. ‘암, 이래 놓으니까 새집에 진배없네요. 솜씨가 대단하십니다.’
이 바쁜 세상에서, 자고 나면 변하는 현대에서 100년 후에 읽힐 명작 한편 쓴다고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은 안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충고 한다. 경제논리로, 형편없는 비생산병이라고 빈축한다. 요즘 허름한 집들 많으니까, 얼렁뚱당 문패를 바꿔 달아 놓고 집들이를 하면 부자도 되고 칭송도 받고, 그러면 평론가들처럼 고뇌할 것도 없고 수필가로서 인격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헛기침을 할 수 있다고 나를 해댄다.
그놈들에게는 ‘꾸미는 기법’은 있어도 ‘창작기법’은 없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모른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새로운 상상을 치열하게 디자인할 밖에. 그래야 그걸 수필로 봐야 할 지 모르겠다고 게재를 거부하는 잡지사도 존재하지 않겠는가. 나는 ‘아름답게 설명’이 아니라 후광을 뿜는 잠언의 집이라는 몸을 디자인 하는 것이다. 왜? 나는 살아있으므로, 그리고 디자인 없이 창작은 불가능하므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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