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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칭찬을 마치면 처벌이 끝납니다

by 안규수 2023. 2. 18.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하나님이 우주의 어느 곳에나 계시다면,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분이 계시다면, 
심지어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을 상상할 수도 없다면, 
이 임재의 하나님이 어찌하여 세상에서 한 목소리로 찬양을 받지 못하시는가?

족장 야곱은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신 32:10) 이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하나님을 보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라고 외쳤다. 
순간을 무수히 잘게 나누어 ‘순간의 조각’이라고 부를 것 같으면,
어느 ‘순간의 조각’에도 야곱은 만유 안에 충만히 임재하는 분 밖으로 나간 적이 없었다.


다만, 그가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몰랐을 뿐이다.


이것이 그의 문제였고, 또 우리의 문제다.


사람들은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일 알게 된다면 얼마나 큰 차이가 생기겠는가! 
‘임재’와 ‘임재의 나타남’은 동일하지 않다. 
둘 중 하나가 없다면 다른 하나도 없다. 
그분이 여기에 계시다는 것을 우리가 전혀 몰라도 그분은 여기에 계신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임재를 의식할 때에만 나타나신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영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을 우리에게 나타내는 것이 성령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면 그분은 자신을 나타내실 것이다.

이런 그분의 나타남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분의 얼굴의 빛으로 빛나는 삶’이냐, 
아니면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냐가 결정될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에나 임재하시며, 그분 자신을 나타내기를 늘 원하신다.

각각의 사람에게 그분은 자신이 존재하신다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기 원하신다. 
그분이 누군가의 설득을 듣고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실 필요는 없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출 34:5)라고 말한다. 
그분이 말로 그분의 본질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분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셨을 때 모세의 얼굴 피부가 초자연적인 빛으로 빛났다.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시겠다는 약속이 말 그대로 사실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정말 복된 일이 될 것이다. 
그분의 약속이 많지만, 애당초 성취할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약속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믿는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을 찾으려는 우리의 시도가 성공할 수 있는 이유는 
오로지 그분이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려고 늘 노력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어떤 사람에게 그분을 드러내시는 사건은 어떤 중요한 일로 언젠가
인간의 영혼을 잠깐 방문하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완전히 오해다.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시고 인간이 그분을 찾아가는 것이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과 그분 사이의 만남에는 물리적인 거리의 개념이 들어 있지 않다.

이 만남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경험의 문제다.

하나님께 가깝다거나 그분에게서 멀어졌다거나 하는 말은 
평범한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개념을 이용하여 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내 아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내게 더 가까이 온다”라고 말한 경우를 생각해보자. 
하지만 사실 그의 아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늘 그의 곁에 있었다. 
평생 하루이틀 이상 집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말은 무슨 의미인가? 
그는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의 말은, 그의 아들이 그를 더욱 친밀하고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며, 
두 사람의 생각과 감정 사이의 장벽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며, 
부자(父子)의 생각과 마음이 더욱 깊이 연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매일 십자가 앞에 더 가까이 가오니”라는 찬송가를 부를 때 
우리는 ‘장소의 근접’이 아니라
‘관계의 가까움’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점점 더 많이 의식하게 해달라고, 
즉 그분의 임재를 더욱 완전히 의식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존재하지 않는 신’을 부르기 위해 우주 저쪽까지 들리도록 고함을 지를 필요가 없다. 
그분은 우리의 영혼보다 가까이 계시고, 우리의 가장 은밀한 생각보다 더 가까이 계신다.

- 하나님을 갈망하다, A.W.토저 / 규장

† 말씀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시편139장 7절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 요한계시록 3장 20절

† 기도


늘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소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더욱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아프리카 잠비아의 화전민 바벰바족은 ‘마을에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부족’으로 유명합니다..
범죄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그동안 단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기에 사회학자들은 처음엔 이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주 오랜 기간 많은 학자들이 이 부족을 연구했는데 그 결과 가벼운 경범죄는 종종 일어났지만 
그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정말로 한 명도 없었습니다.
사회학자들은 교화에 목적을 둔 바벰바족의 독특한 범죄자 처벌에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누군가 잘못하면 마을 사람들은 죄인을 둘러싸고 돌아가며 칭찬을 합니다.
‘지난번 음식을 나눠줬던 일,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와줬던 일, 밝게 인사를 해주었던 일…’ 등과 같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칭찬을 마치면 처벌이 끝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은 죄인은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깨닫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마을에서는 죄인의 회심을 축하하는 성대한 잔치가 벌어집니다.
죄인인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후의 처방이 놀라운 사랑이었듯이 
진심 어린 사랑과 격려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귀한 형제이자 자매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따스한 사랑으로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십시오. 
아멘!

주님, 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격려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행실이 바르지 못한 사람들에게 더더욱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가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