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남한에서 가장 높고 백두산, 금강산과 함께 '민족의 3대 영산'으로 꼽히는 한라산(漢拏山 1,950m)은 '정상에 서면 은하수를 끌어당길 수 있을 만큼 높다'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한라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은하수)을 끌어당길 만하기 때문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 은하수를 끌어당기는 한라산
제주 토박이들에게 '한라산은 곧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라는 의식이 뿌리 깊다. 한라산이 있어 대지가 있고, 그 자락에서 제주 사람들은 삶을 일구어왔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가장 큰 섬이자, 행정구역 중 제일 작은 도(道)인 제주도는 실제로 하나의 큰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부에 집중적으로 모여있는 해발 고도 1,000m 이상의 봉우리 20여 개를 제외하면 나머지 산체는 방패를 엎어놓은 듯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낮아지다가 바다와 만나는 산이 한라이다.
다만 한라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면적은 제주도 전체 넓이의 8% 정도이다. 공원 구역이 한라산이라는 통념이 생긴 배경 같다. 제주도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한라산에 겨울 왕국이 찾아왔다. 올해 겨울이 시작되자마자 폭설이 연이어 내려 새하얀 눈꽃 세상이 펼쳐졌다.
◇ 눈과 상고대로 찬란한 순백 세계
산은 계절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중 어느 계절의 산이 가장 아름답냐는 물음 같은 우문도 별로 없다. 한국의 산은 사시사철 그 풍모와 매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가을 단풍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환상의 세계와 맞닿았을 듯한 설산을 대신할 수 없다. 그래서 명산에 폭설이 내리면 산행을 떠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산 애호가들이 적지 않다.
한라산에는 주로 1월 중순쯤에 눈이 많이 내린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이례적으로 12월 중순부터 폭설이 연속됐다. 적설량이 많은 곳은 탐방로 데크 위에 눈이 1m 이상 쌓였다. 나무 데크의 난간이 완전히 눈에 묻힌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한라산 탐방로 7개 중 풍광이 특히 빼어난 영실 탐방로에서는 순백의 눈과 상고대로 빛나는 설국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밤새 내린 서리가 나뭇가지, 풀잎 등에 하얗게 얼어붙어 마치 눈꽃처럼 보이는 얼음 조각이 상고대이다. 해가 나면 금방 녹아 버리는 상고대는 눈꽃보다 더 어여뻤다.
설국에서는 눈과 구름, 안개가 몰아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고, 순식간에 하늘이 열려 눈부시게 맑고 밝은 순간도 있었다. 하늘의 구름은 2배 속, 3배 속으로 돌아가는 영상에서처럼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흩어지기도 했다. 구름이 흩어져 파란 하늘이 나타나는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탐방객들은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허공을 바라보며 기다리기도 했다.
탐방로가 눈에 파묻힌 구간에는 빨간 깃발을 단 긴 장대가 눈밭에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었다. 탐방로를 표시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구름이 끼거나 눈보라가 치면 이마저도 보이지 않아 순식간에 길을 잃기 쉬웠다. 단독 산행의 위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설산에서 탐방객들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묵묵히 올랐다. 성인보다 더 힘차게, 가볍게 올라가는 어린이들도 눈에 띄었다. 눈 세상이 신기하고 좋은 것 같았다. 힘들어도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행복한 표정이었다.
◇ 신들의 거처, 영실(靈室)
한라산이 제주도를 상징한다면 영실은 백록담 다음으로 한라산을 대표한다. 영실은 백록담 남서쪽 산허리에 있는 골짜기다. 계곡의 길이는 약 1.6㎞, 깊이는 약 350m에 이른다. 직벽에 가까운 거대한 바위들이 겹겹이 치솟아 있다. 영실의 기암은 약 5천 개로, 바위 절벽들은 말발굽 모양으로 빙 둘러서 있다. 신들의 방, 신들의 거처라는 이름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은, 장엄한 광경이었다. 병풍바위라고도 불리는 영실의 기암들은 하나하나가 장군의 기백을 내뿜기에 오백장군, 오백나한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영실은 제주도 10경인 '영주 10경' 중 하나다.
영실을 지나 고도 1,500∼1,700m에 이르면 한라산에서 가장 넓은 고산 초원 지대인 선작지왓을 만난다. '돌이 서 있는 밭'이란 뜻의 선작지왓은 자연경관이 뛰어나 명승으로 지정된 곳이다. 눈 덮인 고산 초원은 신비감을 더했다.
윗세오름은 선작지왓과 백록담 사이, 고도 1,700m에 위치한다. '윗세오름'은 고도 1,100m 부근에 있는 세 오름보다 위에 있다는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백록담에서 제일 가깝고 큰 오름이 붉은오름, 가운데가 누운오름, 아래쪽이 족은오름이다. 윗세오름의 동북쪽에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이 있다. 윗세오름은 구름 속에 숨어 탐방객들에게 모습을 드러내 주지 않았다. 그러나 탐방객들은 윗세오름 표지목 옆에서 인증 사진을 찍으며 기쁨에 겨워했다. 영실, 어리목, 돈내코 탐방로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한라산 정상과 백록담에 가려면 성판악 탐방로나 관음사 탐방로로 가야 하는데 코스가 왕복 20㎞에 가까운데다 기상 때문에 탐방할 수 없는 날이 많다.
영실, 어리목, 돈내코 탐방로로 한라산에 오른 등산객들이 모이는 장소인 윗세오름 대피소에는 항상 활기가 넘친다. 고비를 넘기고 목표에 닿은 만족과 기쁨이 아늑한 대피소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요기하면서 보니 대피소 창 유리까지 눈이 차올라 있었다.
윗세오름에서 돈내코탐방로 쪽으로 가면 백록담 화구의 남벽을 잘 관찰할 수 있다. 절벽인데다 일조량이 많아 눈이 쌓이지 않은 남벽은 하얀 눈밭 가운데 홀로 우뚝 서 수직과 수평의 수많은 주상절리를 과시하고 있었다.
◇ 80㎞의 환상 숲길, 한라산 둘레길
한라산 설경을 체험하기 위해 반드시 백록담을 향해 올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파른 산길을 등산하는 게 부담스럽거나 한가롭게 거닐며 설산을 즐기고 싶다면 해발 600~800m의 한라산 중턱에 조성된 둘레길을 걷는 것도 방법이다. 둘레길은 천아숲길, 돌오름길, 산림휴양길, 동백길, 수악길, 시험림길, 사려니숲길, 절물조릿대길, 숫모르편백숲길 등 9개 구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총길이는 약 80㎞이다. 도보여행 길로 유명한 제주 올레길이 해안 가까이 걸으며 현지 생활과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장소라면 한라산 둘레길은 산속을 걸으며 명상에 잠기고 심신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다.
둘레길 중 탐방객이 가장 많이 걷는 곳은 4코스 동백길 구간이다. 7구간 사려니숲길도 방문객이 많으나 대부분 관광객으로, 10㎞에 이르는 이 구간 전체를 걷는 탐방객은 많지 않다. 무오법정사에서 한라산국립공원 돈내코 탐방안내소까지 11.3㎞에 걸쳐 있는 동백길에서는 동백나무, 삼나무, 편백, 붉가시나무 군락을 만날 수 있다. 동백길에는 수령이 어린 동백나무들이 높은 밀도로 분포하며 자연림을 이루고 있었다. 사단법인 한라산둘레길의 김서영 팀장은 "나무를 땔감으로 사용하지 않으면서부터 동백 숲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 같다"며 "숲의 나이가 오래된 것은 아니나 동백 군락이 워낙 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백 군락은 동백길을 중심으로 약 20㎞에 걸쳐 형성돼 있다. 반면 수령 80년 이상의 노거수가 빽빽한 삼나무 숲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삼나무 인공 조림지였다.
동백길에서는 전문 안내자의 해설을 들으며 탐방하는 팀들을 여럿 마주쳤다. 단체 탐방객들은 4~5일 제주에 머물며 둘레길 9개 구간을 완주하거나 여러 코스를 이어 걷는 경우가 많다. 동백길 종점에 다다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평화로운 서귀포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백길 시작점에서 두껍게 쌓여 있던 눈은 차츰 그 양이 적어져 서귀포가 가까워지자 어느새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따뜻한 서귀포에서는 노루도 3차례 만났다. 겨울에서 봄으로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한라산의 겨울은 감동적이고, 다채로웠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3년 2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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