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아들의 편지

톨스토이의 「북두칠성」

by 안규수 2023. 8. 2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호흡,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루 조를 통해 누구를 사랑해 주길 원하십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첫 이스라엘 여정은 보통의 성지순례와 많이 달랐다.

일단 제목이 ‘광야 원정대’였는데 성경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테마였다. 
그것은 약속의 땅을 정탐할 사명을 가진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였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뽑은 열두 명의 지휘관들에게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정탐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들을 파송했다. 
그것이 광야 원정대의 뜻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스라엘에 들어간 바로 그 기간이 
사십 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그 땅에 대해 악평을 쏟아놓았던 날이었다. 
성서력으로 아브월 9일을 티샤브 아브(Tisha B’Av)라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 날을 자신들의 국치일로 기념하고 있었다. 
여행 기간 중 그해 8월 8일이 그 날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일 년 중 그 날을 가장 수치스럽고 후회되는 날로 기억하고 
통곡의 벽 앞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마음을 찢는 회개의 애곡을 외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땅을 악평했던 그들의 말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되었고, 
악평했던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생을 마치는 큰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월 9일은 반복되는 저주와 멸망의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큰 역사적 사건들만 정리해보면,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1차 성전이 무너졌던 날이 아브월 9일이다. 
그런데 AD 70년에 2차 성전이 로마에 의해 무너진 날도 같은 날인 아브월 9일이다. 
1290년에는 영국에서 에드워드 1세의 령(令)으로 유대인들이 추방된다. 
그날도 아브월 9일이었다.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추방되는데 모두 아브월 9일이다.

1935년 아브월 9일에는 유대인 학살 결의안인 뉘른베르크법이 독일 의회를 통과하고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이 모든 일이 놀랍게도 다 같은 날 일어났다. 
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땅에 대한 악평의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악평’이라는 것이 단순히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악의 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이방인들과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악평을 쏟아내고 분노하는 반유대주의에까지 이어지는 저주였다. 
비단 나치 독일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함께 살아가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 
영국이나 스페인 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그 백성들에 대한 악평이 분노로 변해갔고 
곳곳에서 추방과 함께 토라와 탈무드를 불태우는 일들이 일어났다. 
십자군에 의해 헤아릴 수 없는 학살과 폭행이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났고,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는 통로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에 들어가서 처음 들어본 티샤브 아브(아브월 9일)의 이야기를 통해서 배우게 된 것은, 
말이라는 것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어 세상을 지키고 충만하게 할 인간이 
악평’이라는 저주의 도구가 될 때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서도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창세기 12:3

대적이 그토록 원하는 것은 우리가 약속의 땅과 그 백성을 악평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정탐과 악평의 시간에 이스라엘로 부르신 하나님의 마음을 지금도 붙들기를 원한다.

이스라엘의 첫 여정은 일본 동경에 있는 이스트윈드교회의 청년들과 함께 연합해서 진행되었는데, 
전에 원수 되었던 한국과 일본이 이스라엘의 회복이라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함께 연합한다는 것이 진정한 원뉴맨의 성취임을 경험하게 되었다. 
땅에 대한 악평과 사람에 대한 악평은 공통점이 있다. 
사람 역시 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동행한 일본인 성도들과 함께 여리고성에 가서 이 원수 맺음과 비방의 주술이 끊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다니! 
그저 나 자신의 문제나 잘 풀리지 않는 주변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과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이 스스로 놀라웠다. 
‘한 새사람’이 열리면서 여러 유익이 있었지만 
그중에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변화는 ‘나’라고 하는 애굽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오래전 여리고를 정탐하던 그들의 눈에 보이던 성벽은 너무 견고했고, 
아낙 자손들은 거인처럼 보여서 스스로가 메뚜기처럼 느껴졌다. 
골로새서 2장 18절을 보면 악평이란 자신이 본 것에 의지하여 과장된 두려움을 만들면서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내가 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그것을 붙든 자들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해서 판단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심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 민수기 14:6-8

결국 십계명과 율법에서 말하는 보이는 신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는 
우리가 얼마나 보여지는 것에 쉽게 현혹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판단의 기준을 보이는 것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둔다면 내 입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대언자가 될 수 있다. 
이것이 그날 여리고에서 열린 원뉴맨을 위한 기도이다. 
그 현장에서 이런 기도가 내 입술로 선포된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 큰 축복이요 영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도 중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불어왔다. 
예배는 점점 깊어졌고 하늘은 훨씬 더 가까이 내려온 것처럼 느껴졌다.

- 한 새사람, 강대위

† 말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 마태복음 7장 1, 2절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 에베소서 4장 32절

† 기도


하나님, 저는 보여지는 것에 쉽게 현혹되어 하나님을 부정하는, 나약하기 그지없는 자입니다. 
두려움 안에서 악한 말을 하지 않게 하소서. 
보여지는 것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게 하소서. 
오직 하나님만이 저의 판단 기준이 되게 하시고, 승리를 선포하는 자가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요일 3: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어떤 나라에 극심한 가뭄으로 풀과 나무가 완전히 말라버렸습니다.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소녀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빈 항아리를 들고 방방곡곡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은 없었고 길을 거닐던 소녀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소녀의 눈에 쓰러져 죽어가는 강아지가 들어왔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강아지에게 물을 조금 나눠주었는데 항아리가 은으로 변하며 다시 물이 가득 찼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어머니에게 물을 떠드렸는데 
고생한 소녀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에게 먼저 물을 건넸습니다. 
그러자 항아리가 금으로 변하더니 물이 다시 채워졌습니다, 
그때 한 걸인이 나타나 물을 조금 줄 수 있겠냐고 묻자 소녀는 흔쾌히 항아리를 건넸습니다. 
그러자 항아리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변했고 이내 하늘로 올라가 반짝이는 7개의 별이 되었습니다.

이는 톨스토이의 「북두칠성」이라는 단편입니다.
톨스토이는 사랑의 방향이 자기 자신이 아닌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미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흘려보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세상으로 흘려보내십시오. 아멘!!!

주님, 부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이웃에게, 세상으로 흘려보내게 하소서.
사랑의 방향이 나 자신이 아닌 이웃과 하나님을 향하게 합시다.
 <김장환, 나침반 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