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비/오탁번 수수밭 김매던 계집이 솔개그늘에서 쉬고 있는데 마침 굴비 장수가 지나갔다 굴비사려! 굴비! 아주머니 굴비사요 사고 싶어도 돈이 없어요 메기수염을 한 굴비 장수는 뙤약볕 들녘을 휘돌아 보았다 그거 한 번 하면 한 마리 주겠소 가난한 계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품 팔려 간 사내 얼굴이 떠올랐다 저녘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올랐다 웬 굴비여? 계집은 수수밭 고랑에서 굴비 잡는 이야기를 했다 사내는 굴비를 맛 있게 먹고나서 말했다 앞으로는 절대 하지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이삭이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 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며칠 후 굴비 장수가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날 저녘 밥상에 굴비 한 마리가 또 올랐다 또 웬 굴비여! 계집이 굴비를 발라주며 말했다 앞으로는 안했어요 사내는 계집을 끌어 않고 목이 메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세도록 사랑의 등 깜박이며 날아 다니고 베짱이들도 밤 이슬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시하늘> 2003년 가을호 폭설/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하면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 부렸당께! 이튿 날 아침 눈을 뜨니 간 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워메, 지랄나부렸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 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논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 날 새벽 잠이 깬 이장이 밖을 내다 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래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 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지붕도 폭삭 무너져 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 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한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이 시를 읽고 -해학의 진수 오탁번 시인은 대단한 입담가다. 자칮 잘 못 들으면 그저 홍당무가 되어버릴 그런 이야기를 이렇게 태연하게 엮어 내는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더구나 웃음이 절로 나오면서도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로 그것을 변주해 내는 실력이라니.... '굴비'는 음담패설이다. 시인이 이야길 처음 듣고 차마 웃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렸단다. 그는 음담패설에 묻어 있는 삶의 곡진함까지 통찰하고 맛깔스런 시로 탄생 시켰다. 물론 이 시는 허구의 산물이다.그러나 이런 음담에도 삶의 진실은 있는 것이다. 웃다가 결국 울고 마는 이야기. 그런 상식을 초월해 버리는 역설은 시인의 특유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내와 계집의 사랑을 묘사하는 두 구절, '수수밭 이랑에는 수수이삭 아직 패지도 않았지만/ 소쩍새가 목이 쉬는 새벽녘까지/ 사내와 계집은/풍년을 기원하며 수수방아를 찧었다. '개똥벌레들이 밤새도록/사랑 등 깜박이며 날아 다니고/베짱이들도 밤 이슬 마시며 노래를 불렀다.
오탁번 / 시인 소설가 1943년 충북 제천 산 고려대 영문학과 동대학원 졸업 < 문학박사> 1966년 <동아일보> 신문문예 동화, 196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1969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시집 <아침의 예언>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 <생각나지 않는 꿈>등 소설집 <겨울의 꿈은 날 줄 모른다> <처형의 땅> <순은의 아침> 등 수상 <한국작가상> <동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등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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