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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평준화의 법칙

by 안규수 2015. 7. 2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 지요? 


내가 약함을 알고 느낄 수 있는 환경이 내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를...

그 때야 하나님의 강함을 볼 수 있기에,

그 때야 하나님 사랑의 눈빛을 느낄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서 있을 수 조차 없음을 알기에,

그래서

어디서나 겸손히 당신 앞에 서 있을 수 있기에,

하지만 타락한 본성은 늘 내 강함을 느끼고 싶어하며 드러내고 싶어 하지요.

권위와 명예, 부 그리고 성공...


나는 약하지만,

강한 하나님의 손이 나를 붙잡고 계시기에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해 겸손하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해 보는 아침입니다. ^0^ 


오늘은 권성수님의 <믿는 만큼 행동한다>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넉넉한 하루를 열어가길 소망해 봅니다. ^0^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부자를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는 우리의 현실 어디에서나 항상 공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월을 커다란 평준대로 사용하십니다.  


전경일의 저서 《마흔으로 산다는 것》에서는 인생의 평준화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40대는 욕망의 평준화라고 합니다. 

누구나 다 사회적 성공을 위해, 다가오는 노년 준비를 위해 가장 왕성한 욕망을 가지고 뜁니다. 

50대는 지식의 평준화입니다. 

명문대 졸업생이나 초등학교 졸업생이나 살면서 얻는 지식이라는 것이 다 그렇고 그런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60대는 외모의 평준화입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나 식당 아줌마나 그 얼굴이 그 얼굴입니다. 

70대는 성(性)의 평준화입니다. 

남편이 있으나 없으나 아내가 있으나 없으나 성관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80대는 부(富)의 평준화입니다.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하루 세 끼 먹고 사는 것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90대는 생사의 평준화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모호합니다. 

살았다고 죽은 자보다 별로 나은 것이 없고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100대는 자연 속의 평준화입니다. 

모두 죽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니 누구나 자연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세월’을 통해서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을 평준화시키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재배치시키십니다. 

부자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잘살았지만 죽고 나서 지옥에 갔습니다. 

반면 나사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이 다 평준화되게 하십니다. 

낮은 사람은 영적 높음을 자랑하라고 하시고, 높은 사람은 인간과 물질의 무상함을 통해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동일한 천국 시민으로, 동일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다 하나 되게 하십니다. 


세월을 통해 평준화시키고 죽음을 통해 재배치시키시는 영원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서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의 교훈입니다.  


시소의 한쪽 끝에 부유한 신자가 있습니다. 

다른 한쪽 끝에 가난한 신자가 있습니다. 

부유한 신자에게는 자신을 낮추라고 하고 가난한 신자에게는 자신의 높이를 자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평준화시키십니다. 

중간에 있는 균형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자매라는 것입니다.  


성숙하셔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으시면 됩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무시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떠받들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이 아무리 우리의 영웅이라고 추앙해도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고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 때 정말 자유롭습니다. 


가난해도 자유롭고 부해도 자유롭습니다. 교만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쭈그러들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 때 가정이 행복하고 공동체가 행복해집니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부하거나 가난해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모든 것이 된다는 의식으로, 

어떤 경우에도 내게 능력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행복한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 야고보서 1장 9~11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 빌립보서 3장 7~9절


주님 외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며 세상적인 시각의 부와 명예를 내려놓길 원합니다. 

평하신 하나님, 주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제 자신을 낮추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잠 18:13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10년 전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말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경청’으로 대표되는‘말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경청이 더 중요하다고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듣지는 않습니다. 

의사들은 환자의 말을 평균 17초 만에 가로막는다고 합니다. 

때문에 환자의 증상을 세세하게 판단하지 못하며 이로 인해 의료문제가 발생해 많은 사회적 손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전문직 종사자들이나 고객문제를 처리하는 상담사의 경우에는 의사들의 경우보다도 더욱 짧다고 합니다. 

말하기보다 듣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실제로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별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학자인 모티머 애들러는 지금으로부터 약 40년 전에 이미 듣기의 중요성에대해서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이유는 듣는 법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는 능력 또한 재능이며 훈련이 필요한 일이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 


경청은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라 노력과 훈련으로 완성되는 일입니다. 

이제는 듣는 일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할 뿐 아니라 실제로 듣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사람들의 음성에도, 또한 하나님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 듣는 연습을 하십시오.  


주님, 마음을 고요히 하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는 표정과 시선까지 사용해 경청하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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