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하노이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지난 주는 아주 쌀쌀하더니 이번 주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주 무더운 날씨이네요~
이런 반전이 하노이의 매력이기도 한 듯 합니다. ^0^
오늘도 한 주간의 업무 잘 마무리하시구요,
행복하고 평화로운 주말 만들어 가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은 지용훈님이 <말씀으로 생각을 태우라> 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속에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말 한 마디에 나는 굉장히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어찌 한 구절 속에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다 있을까? 그게 말이 되는가?’ 나는 의아했다.
그러나 그 순간 성령의 밝은 조명이 비춰졌다.
‘아, 주님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주와 함께 죽었구나.
죄만 씻어진 게 아니라 죄의 뿌리인 자아가 주와 함께 죽었다는 것이구나!’
이것이 순간적으로 깨달아지자마자 율법적으로 애쓰고 난 후 느껴지는 차원이 아닌 영혼의 자유가 깊은 곳에서 샘솟기 시작했다.
죄 사함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던 자아,
부당한 것을 못 참고 오해받는 것을 못 참았던 자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는 사실이 한순간에 깨달아졌다.
그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려고 주신 자유가 무엇인지 진정으로 알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하나님의 사명을 받기 위해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자아가 직접 통과해야만 했다.
나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을 때, 나의 결정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용납해야 했고,
관계의 어려움들이나 억울하게 오해받는 일을 참아야 했다.
나는 찾아가서 해명하고 싶었으나 주님은 침묵하게 하셨고
오히려 오해를 만들어내는 자들을 축복하게 하셨다.
신기한 것은 죄 사함만 체험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나를 깨닫지 못했을 때
억지로 했던 축복이 이제 완전히 바뀌어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평강 가운데 오해를 만들어내는 자들을 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해받는 것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누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죄 사함만 체험했을 때와는 달라진 것이 있었다.
자신을 주장하고 싶고 부당한 대우에 대하여 못 참는 자아가 여전히 느껴지지만,
나는 그 생각을 즉시 태워버리고 입술로 “이 자아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십자가의 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자아가 죽었다는 십자가의 도를 외치면서부터
더러운 옷과 같은 나의 자아의 실체가 더 잘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나는 삶의 창피한 부분도 잘 오픈하는 편이었다.
나는 어느 날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까지 오픈을 하면서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야, 내가 참 괜찮은 사람이기는 하네. 이런 것까지 솔직하게 다 나누다니….’
그 순간 나의 숨은 의를 깨닫고 깜짝 놀랐다. 선한 자아의 모습 뒤에 숨어 있는 흉측한 나의 의가 발견되었다.
그 숨은 의가 발견되자마자 하나님께 들킨 것 같아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나타났다.
그런데 다시 더 깊은 내면 속에 있는 교만을 발견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그 모습을 대견해하는 내 의가 또 보였으며,
또 더 깊은 곳에 숨겨진 내 의까지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자랑스러워 하는 자아가 보였던 것이다.
나는 자아의 깊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느껴졌다.
마치 블랙홀 같은 자아의 깊은 늪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때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내가 함께 죽었다는 것이 진정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갈라디아서2장 20절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 이사야 64장 6절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로마서 6장 6절
주님, 제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짓되고 이기적인 자아의 실체를 보게 하시고 주님 앞에 내려놓게 하소서.
정직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 나의 어리석음을 고백하며 다시금 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길 원합니다.
"주님 이 꽃을 받으세요."
말은 하지 않아도 꽃을 들고 쭈욱 뻗은 작은 아이의 손은
주님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나의 피곤한 눈, 무거운 입술, 굳은 표정.
나는 아직 사랑을 표현하기에는 어색하고 서툴러도
이제는 나의 마음과 입술이 주님의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미 6:8 사람이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람들이 원하는 인맥을 갖추지 못하는 데에는 크게 4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제한된 사람들과의 만남.
프페페라는 사회학자는 70명을 만날 때마다 5명의 친구가 생긴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따라서 친한 사람을 많이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사람을 대하는 기술의 부족.
가장 직접적인 언어의 사용부터 비언어적 표현까지 사람을 대하는 기술은 만남 이후의 관계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3. 극단적인 관계형성.
좋아하거나 싫어하기, 명령하거나 명령받기와 같이 어떤 극단에 서 있는 관계를 추구하는 경우에는
인맥 형성에 대부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4. 사람을 대하는 잘못된 사상.
사람을 소중한 존재로 대하지 않고 필요를 위한,
이용을 위한 존재로 바라볼 때 진정한 관계는 절대로 형성되지 못합니다.
대인관계의 어려움은 나의 부족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해달라고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주님, 사람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믿음의 가이드가 되게 하소서.
원하는 인맥을 위해 부족함 점이 무엇인지 분석해 보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