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후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을 읽고

by 안규수 2013. 9. 26.

 

    가을의 문턱에 들어섰지만 한 낮의 뜨거운 열기는 8월의 폭염 못지 않다. 요즘 나는 명절에다 이사 준비까지 겹쳐 그 열기만큼 바쁜 나날의 연속이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모래의 언덕’에 파묻혀 있다. 책갈피 사이로 모레가 후드득 떨어진다. 모래 구덩이 속에 갇혀 진득진득한 모레를 온 몸에 뒤집어쓰고 앉아 있다. 내 얼굴에는 태양은 이글거리고 굵은 땀방울이 모래와 뒤엉켜 한줄기 소나기라고 퍼부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한창 젊은 나이에 나는 ‘아라비아의 로랜스’ 영화를 보고 숨 막히도록 열연하는 주인공 ‘피터오톨’의 푸른 눈에 흠뻑 빠져 홍역을 앓은 적이 있다. 사막, 끊임없는 모래의 언덕, 광풍을 뚫고 낙타와 함께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은 나의 우상이었다. 자기애에 함몰된 정신은 극기克己의 몸짓으로 나타나고, 그 젊은 객기가 그토록 좋았다.

  그때의 사막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매력 덩어리로 푸른빛의 희망이 가득한 들뜬 기대감이 있었지만 아베 코보의 ‘모래’는 이제 늙어버린 내 객기의 대상이 되기에는 참 절박한 느낌이었다. 그 남자가 앉아 있는 사구의 좁은 공간은 숨 막히는 절망의 늪이다. 지붕에 끊임없이 쌓이는 모래를 치우지 않으면 살수 없는 공간, 생존의 몸부림이자 시지프의 몸짓이다.

   30여년의 긴 세월을 ‘직장’이라는 모래구덩이 속에 파묻혀 살아온 내 모습이 소설속의 남자로 오버랩 되어 숨통을 조이고 있는 공간이다.

  학교 선생인 한 남자가 어느 날, 곤충 채집을 위해 사구로 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의 목적은 사구라는 생존의 조건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모질게 살아남은 곤충을 채집하여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허영심虛榮心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 ‘허영심’은 스스로 모래 구덩이에 빠져 그 자신이 곤충으로 변신하고 만다. 그의 작은 욕심이 그 자신을 채집함으로써 그의 존재는 실종되고 만 것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텅 빈 방안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독충으로 변신한 인간, 그의 정신은 살아 있지만 몸은 징그러운 독충이 되어 인간 세상과 결별된 존재의 상실을 ‘모래의 여자’에서도 보게 된다. 이것은 미궁 속을 헤매고 있는 우리의 모습, 소외되고 왜곡된 자아의 모순을 형상화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과 맞지 않은 여러 가지 사실 묘사에 대해서 궁금해진다. 1960년대에 시대적 배경이라지만 어떻게 그런 마을이 존재할 수 있을까? 도대체 아베코보는 그 시절에 어떻게 모래에 갇혀 빠져 나오지 못한 남자 이야기를 생각해 낸 것일까? 그 상상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동 시대의 작품으로 우리의 작가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있다. 안개는 기체이고, 물은 액체이고, 모래는 고체이다. 모래와 안개는 단절과 폭력과 허무의 상징이다. 모래는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안개는 감각적이다.

  

  ‘유동이 모래의 생명이다. 절대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모래는 절대로 쉬지 않는다.’

 

 

  모래의 유동은 인간의 삶이다.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유동은 인생유전人生流轉이기 때문이다. 

  모래 구덩이 속, 집이 파묻혀 버리지 않게 하기 위하여 매일매일 삽질을 해야 하는 반복적인 행위에게서 '노동하는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없다. 가득한 허무뿐이다. 그래서 모래는 안개와 일맥상통 一脈相通하고 있다.

  이 여자, 어찌 보면 남자 보다 한 수 위다. 질린 세상을 탈출하여 절대적인 고독을 즐기는 여자, 외형상으로는 모래에 순응하는 여자와 모래에 저항하는 남자 사이다. 그에게 남자는 어떤 존재 이었을까? 그는 왜 알몸으로 누어 잤을까. 칙칙한 모래 때문에? 흔히 인생에 무슨 아기자기한 논리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삶이란 필경 맹목(盲目)이다. 서른을 갓 넘긴 여자의 몸매는 아름다웠다. 그래서 남자의 속내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고 결국 모래에 순응하는 남자가 된다. 탈출의 시도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의 몸부림일 뿐이다. 딱히 도망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종장에는 남자 역시 모래에 ‘순응하는 남자’가 되므로 제목 ‘모래의 여자’는 적절하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김승옥은 작가의 해설은 무의미하고 반은 독자의 몫이고 반은 신의 몫이라 했다.

   모래의 서걱거림, 맛대가리 없는 삶의 서사(敍事), 우연과 혼돈이 버무러진....

  ‘모래의 여자’ 읽고 나니 상당히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삶이란 것이.... 그러나 당장 다음 주까지 읽어야 할 ‘아웃’에 손길이 가지 않는다. 너절하면서도 묘한 이 느낌을 지우고 싶지 않아서다.

 

   ‘따라서 모래로 양분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 세상과 모래 구멍 속의 세계는 실은 한 공간의 다른 모습이며, 인간은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가 다른 세계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모순을 사는, 그리하여 늘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이다.’

 

  이 소설을 번역한 김난주님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