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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내 생애 단 한번) 약속 / 장영희

by 안규수 2016. 6. 26.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이유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심장이 천천히 
      오그라드는 듯,  뻐근하게 가슴이 옥죄어 오다가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
      려움과 공허감 말이다.  이 주변머리 없는 성격으로 또 다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이.  아니 앞으로 지상에서의 남은 나의 삶을 하루하루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아득하다. 
      미운 사람 보고도 반가운 척 웃고,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꼭 해야 할 때가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인 줄 알면서도 무조건 남발하고,  누군가의 말에 상처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이 ‘살아감의 절차’를 다시 되풀이해야 할 일이 한심하다.
      시지푸스의 비극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을 또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려놓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가 힘겹게 밀어 올리는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두려움도 같은 이
      유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힘들여 돌을 밀어 올리지만 내일이면 그 
      돌은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있을 테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굴러 
      내려오는 돌 밑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어떤 심리학자는 우리의 과거를 더듬어 첫 번째 기억을 찾아내면 어른이 되어서
      도 자주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혼자 담벼락에 붙어 울던 기억, 
       장터에서 엄마를 잃고 헤매던 기억.  아버지 주머니에서 몰래 돈을 훔치던 기억 
      등 마음 깊숙이 남아 있는 유년의 기억이 간혹 현재의 의식에 표면화되기도 한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첫 기억은 어떤 것일까.  다섯 살이 될 때까지 제대로 앉지 못해 
      누워 있었다는 나.  그 때문에 오히려 나의 어린 시절은 내 일생에서 정신 활동이 
      가장 치열한 때였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의 시작에는 마치 만화경 속의 수많은 
      색종이 조각처럼 제각각 크기와 색깔이 다른 단편적인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흩
      어져 있는데,  그 중 유난히 두드러지는 두 가지가 있다. 
      
      (mother's love /  Paul Peel )
      하나는 세 살  아래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침의 기억이다.  여느 때처럼 엄마 옆
      에서 눈을 뜨니, 밤새 동생이 태어났다고 했다.  그때 산파 아주머니가 대야에 
      물을 담아 들여오는데 마침 창을 통해 아침 햇살 한 줄기가 들어 왔다.  햇살은 
      물 위로 반사되었고 순간, 색 바랜 격자 무늬 천장 위로 어른어른 빛 동그라미들이 
      그려졌다.  한 생명의 소식과 함께 내가 본 밖은 빛 동그라미들, 아직까지 그보다
       아름다운 이미지를 본 적이 없다.  또 다른 기억은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남아 
      있던 기억이다.  낮잠을 자고 깨어 보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 있었고, 집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엄마를 불러 보았으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한동안 천장만 
      바라보고 누워 있던 나는 무심히 다락 쪽을 보았다.  꼭 닫힌 다락문을 보면서 문
      득 그 속에 괴물 하나가 숨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나는 갑자기 지독한 공포에 휩싸였다. 아니, 차라리 괴물이 다락문을 박차고 
      튀어나와 나를 덮치기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다락 속의 괴물과 빛 동그라미들,  어쩌면 내 삶을 축약하는 두 이미지인지도 모
      른다.  어디엔 가 잠복했다가 어느 한순간 뒤통수를 내리칠 것 같은 괴물 같은 삶,  
      그런가 하면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살아 있기 때문에 빛 동그라
      미처럼 찬란할 수 있는 삶.
      태어남은 하나의 약속이다.  나무로 태어남은 한여름에 한껏 물오른 가지로 푸르
      름을 뽐내리라는 약속이고,  꽃으로 태어남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 그 화려함으로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하리라는 약속이고,  짐승으로 태어남은 그 우직한 본능
      으로 생명의 규율을 지키리라는 약속이다.  작은 풀 한 포기, 생쥐 한 마리, 풀벌레
       한 마리도 그 태어남은 이 우주 신비의 생명의 고리를 잇는 귀중한 약속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야말로 넓은 들판 가
      득히 콩알을 널어놓고 하늘 꼭대기에서 바늘 한 개를 떨어뜨려 콩 한 알에 박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나는 우리의 생명은 그러면 무엇을 
      약속함인가.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의 태어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약속이다.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고,  질시 끝
      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드는 일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일은 이 약속을 지켜 
      가는 일이다.  괴물같이 어둡고 무서운 이 세상에 빛 동그라미들을 만들며 생명의 
      약속을 지켜 가는 일이다. 
      
      (Before the bath /  Paul  Peel )  
      며칠 전 한 텔레비전 프로에는 괴한이 뿌린 황산에 온몸이 타들어 가 사경을 헤매
      고 있는 아이의 이야기가 나왔다.
      “어떤 나쁜 아저씨가 골목길에서 일부러 내 머리 위로 불을 쏟았다.”
      여섯 살 난 아이는 ‘일부러’ 라는 말을 썼다.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악
      이었다는 말이다.  아이는 새벽이면 정신이 들어 행복했던 기억을 더듬는다고 했다.  
      형과 함께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골드런 로봇,  무적의 라이징오 로봇을 갖고 
      놀던 일을 생각한다.
      “엄마, 나 골드런 로봇 사도 되나.... 집에 가면 아빠한테 돈 타서 형 아이스크림 
      사 줄기라”
      눈 코 입이 완전히 녹아 내려 한 점의  괴기스러운 살조각이 된 얼굴 뒤에서 아이는
       힘겹게 말했다.  아이 엄마는 말했다. 
      “그제 밤에는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새벽에는 저 애와 
      골드런 얘기를 할 수 없을까 봐,  약속을 지킬 수 없을까 봐, 너무 두려웠습니다.”
      그리고 어젯밤 아홉시 뉴스는 아이의 죽음을 알렸다.  바람 부는 이 세상, 생명의
      약속을 지켜주지 못한 이 세상을 떠난 아이의 빈소에는 로봇들이 줄지어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