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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수필, 불완전함과 더불어 쓰기 / 이상열

by 안규수 2016. 7. 8.

수필, 불완전함과 더불어 쓰기  

                                              이상렬

 

  문학은 지면 위에서 전능자다. 다다를 수 없는 곳, 다루지 못하는 것은 없다. 생명, 사랑, 배신, 분노, 증오, 절망, 허무, 죽음 등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가 인간 본성을 건드린다. 상상은 하늘 끝까지 가닿는다.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생애를 살고, 지우고 싶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인생의 새판을 짤 수도 있다. 문학의 영역은 어차피 금을 긋고 셈할 수 없으니 그 자유분방함은 끝이 없다. 함축, 상상, 허구, 형상화, 미적 장치 등의 무기를 장착한 데다 현란하고 문제적이며 자극적이다. 자존심이 세다. 감히 내 영역에 도전하지 말라는 거다. ‘내가 이렇게 쓰겠다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겠다는데 누가 내 세계를 통제하려는가.’ 이것이 문학의 본령이다.

  반면, 문학 장르 중 수필은 그저 순박하다. 문학이론의 횡포에 숨죽인 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설움이 골수에 박히면 서럽다고도 말하지 않나 보다. 말하고 싶어도 다 말하지 못하는, 아니 안 하는,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서러운 눈물 글썽이는 젊은 아낙 같은 자리. 그래서 더 마음이 아리는 것, 이게 수필이다.

  수필의 품성은 절제다. 그건 표현 못 하는 비겁함이 아닌 자기 통제다. 다 말하지 못해도, 다 드러내지 않아도 얼추 어림잡아 눈감아주고, 그저 살아보니 알겠다 싶은 것, 이것이 수필이다. 가상의 인물을 내세워 벗기고, 미치게 하고, 죽여서 바닥까지 들추어내어 충격을 주고픈 통속 심리가 문학에 가까운 것이라면 나는 되레 탈문학적이고 싶다. 수필은 사실이라는 제한성 때문에 인접 장르에 비해 본질상 원초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문학의 변방으로 몰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문학적이고자 하는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수필적 자존심이다.

  수필의 문학적 포지션이 변방이라면 나 역시 늘 외곽에 자리했었다. 일종의 가장자리 동질감이랄까. 이것이 내가 본능적으로 수필에 끌린 이유다. 나는 자리에 앉아도 버릇처럼 구석진 곳에 앉길 좋아했다. 따라서 나의 수필쓰기는 인생의 가장자리에 숨어 세상을 향해 고개를 삐쭉 내미는 행위다. 가뭄에 마른 숨을 토해 내는 대지가 하늘 향해 입을 벌린 모습 같은 것이다. 사는 날 동안 속속들이 스며든 변방의 애욕이 너무 진득해서 나를 그렇게 만들었나 보다.

  고대 검투사들은 가면을 쓰고 싸웠다. 따라서 자기 얼굴을 숨길 수 있었다. 얼마나 두려운지, 얼마나 외로운지 사람들은 모른다. 나는 울고 있는데 그 가면은 항상 웃고 있다. 또 가면 속 상대방의 얼굴을 알 수 없다. 그가 누군지, 그도 나처럼 아픈지, 얼마나 선량하게 생긴 사람인지. 그저 살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싸울 뿐이다. 내게도 그런 페르소나가 있다. 멀쩡해 보이지만 멀쩡하지 않은 나를 가면 속에 숨긴 채 처절하고 비굴하게, 때론 검투사로 때론 어릿광대로 삶을 연출했다.

  수필 천 편을 읽고, 만 편을 쓰면 외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읽고 썼다. 주제니, 구성이니, 문체니, 이런 것은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한 가면만 벗고 싶었다.

  살다가 더러는 인생 한 몇 십 년쯤 소급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 순간, 작품 하나를 쓰면서 나와 직면했다. 내 우울의 뿌리가 어딘지, 내 죄책감의 근원지가 어디였는지를 찾았다. <그 방앗간>이란 작품에서다. 보라색 볕이 쏟아졌던 방앗간 옆 배꼽마당,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땅바닥에 힘없이 나뒹구는 어머니를 발견했다. 달려가 막아서지 못하고 구경꾼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아이. 내 골방에서 지면의 힘을 빌려 아이를 불러낸 중년의 성인아이. 가면을 벗고 그 아이와 마주했다. 아이는 삼킨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날 밤,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지금껏 쟁여둔 나의 허상을 벗고 진짜 내 속사람을 만났다.

  나의 수필 쓰기, 가장 우선 된 가치는 진정성이다. ‘좋은 산문은 유리창과 같다고 했던가. 미학적 열정보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애를 썼다. ‘사실 앞에서 진실하게 쓰자,’ 이것이 나의 수필관이다. 따라서 되도록 질박한 내 이야기를 쓴다. 남의 이야기를 쓰기에는 내 할 말이 너무 많다. 사무치는 게 넘쳐 툭 건드리면 마구 쏟아질 것 같은데, 다른 대상에 눈 돌릴 겨를이 없다. 비난 받을 일이 아니면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나의 수필쓰기는 연출이 아니라 노출에 가깝다. 정작 나는 울고 있는데, 웃는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해서 내 마음이 웃는 게 아니지 않은가. 과도한 연출은 나도 싫지만 독자가 먼저 알아본다. 더는 연출하고 싶지 않다. 그게 인생이든 글이든.

  나의 수필 중에서 <민들레>란 작품이 있다. 혼자 계신 노모가 은행 빚을 견디다 못해 큰집을 팔아 방 한 칸으로 이사 간 이야기다. 몇 달째 어머니를 찾아뵙지 않은 막냇동생이 어느 잡지에 실린 민들레를 읽었던 모양이다. 늦은 밤 어머니를 찾아와 불효를 용서해 달라며 통곡했다고 한다.

  운전면허 열다섯 번 떨어진 내용을 쓴 수필이 있다. 그 후로 사람들이 내 차 탑승을 거부했다. 한 번은 아들의 응가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하면 십 초 만에 통쾌하게 싸고 나오는 이야기를 아예 대놓고 썼다. 잡지의 발행 부수를 따져보니 20만 독자가 읽은 셈이다. 그 후, ‘아빠는 왜 제 똥 싸는 이야기를 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똥 잘 싸는◯◯이라고 부르게 하느냐며 투덜대기도 했다. 용감하게 노출하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해야 지나왔던 기억 속의 나에게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 것 같아서다.

  글 잘 쓰는 사람이 나는 제일 부럽다. 도저히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의 글을 만나면 절망에 빠진다. 나도 그 사람처럼 글을 잘 쓰고 싶다. 하지만 그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그 사람과 다른 존재다. 내 모습, 내 문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나다운 수필이다. 내 안에 어찌 아름다움만 있겠는가. 한 살씩 더 먹을 때마다 육신은 후패해지고 볼품없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내 모습인데. 애써 꾸며 아름답게 하고 싶지 않다. 세련되기보다 거친 삶의 소리를 떳떳하게 내놓고 싶다. 아름다운 것이 진실이 아니라, 진실한 것이 가장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진실을 방해하는 것이 완벽주의다. 퇴고를 한 번 생각해 보자. 도무지 세상 밖으로 작품을 내놓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유는 완벽한 작품에 대한 욕망 때문에서다. 퇴고에 대한 완벽주의는 내 안에 내가 만든 가혹한 우상이다.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 늘 아직도 무엇인가 모자라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작품을 다 끝내고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자판을 닫으려는 순간 내 안에서부터 원고를 다시 한 번 더 고쳐 보라는 소리가 또 충동질한다. 완벽하라는 환청이다. 원고를 열면 어김없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발견되고, 급기야 최고의 작품이 아니면 차라리 쓰지 말자는 식으로 작품을 아예 내팽개쳐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명문장을 써야 한다는 함정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무엇이 명문장인가. 명문장이란 수사가 아니라 진심이 담긴 문장이다. 대체 얼마나 교정을 하고 얼마나 퇴고를 해야 만족할 것인가. 내가 완전하지 못하니, 나를 표현하는 글도 완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어차피 세상에 완벽한 작품은 없다. 그저 부족하지만 부족한대로, 내 숨결이 녹아 있고 뜨끈한 내 눈물 한 방울이라도 젖어 있으면 충분하다. 완벽한 작품이 아닌, 완벽을 향한 끊임없는 분투가 아름답다. 생각해보라. 완전주의에 사로잡혔을 때, 취하기 쉬운 것이 뭘까. 문장의 미문화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비정상적인 수준의 천재였다. 어학,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다. 당연히 그녀는 완벽주의자였다. 특히 외모 가꾸기는 결벽에 가까울 정도였다. 얼굴에 잡티 하나라도 허락되지 않았다. 요즘처럼 레이저 한 방에 점을 없애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깨끗하고 하얀 얼굴을 위해서 식초와 납 성분이 들어 있는 독성이 강한 물질을 발랐다. 그 때문에 여왕의 얼굴에는 심하게 긁힌 자국이 생겼고, 그 흔적을 감추기 위해서 겹겹이 화장품을 덧칠했다. 결국, 여왕은 궁궐 안에 거울을 달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완벽한 작품을 갈망할수록 미문을 추종하려는 강박에 빠진다. 어찌 보면 그것은 수사(修辭)로 덧칠해서 자신의 빈약한 사상을 감추려는 심리인지도 모른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은 글쓰기 본연의 풍성한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자기 함정일 수 있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수 없는 자에겐 완성이 주는 즐거움도 길지 않으리라. 글쓰기 과정 자체에서 단 한 번의 뭉클함을 느낄 수 있어도 더 이상의 결과물에 연연하지 않는다. 글쓰기의 목적은 가장 높은 경지에 깃대 하나 더 꽂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나만의 골방에서 자발적 유배를 즐기며 심장이 시키는 대로 쓰는 것이다. 내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 글 또한 불완전해야 다운 글이다. 그래서 수필은 불완전함과 더불어 쓰기다.

  수필로부터 나를 옭아매고 걸어온 시간이 아스라하다. 돌아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지만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내겐 중요하지 않다. 수필과 함께 속살거리며 걷는 길에 희열감 하나 영글어 있으면 족하다. 어쩌면 수필에게 평생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을 지고 있기에 이렇게 눈이 시큰거리는데도 새벽 책상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2016 에세이21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