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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내게는 '맛 있는 문장'이 있는가/이상렬

by 안규수 2016. 8. 3.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 Muji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 “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 “예, 한 삼십 분 후에 도착할 겁니다.” 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光州)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로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잔을 빼면서 얘기하는 것을 반수면(半睡眠)상태 속에서 듣고 있었다. 버스 안의 좌석들은 많이 비어 있었다. 그 시찰원들의 말에 의하면 농번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행을 할 틈 이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무진엔 명산물이…… 뭐 별로 없지요?” 그들은 대화를 계속하고 있었다. “별 게 없지요. 그러면서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건 좀 이상스럽거든요.” “바다가 가까이 있으니 항구로 발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요?” “가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럴 조건이 되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수심이 얕은 데다가 그런 얕은 바다를 몇백 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럼 역시 농촌이군요.” “그렇지만 이렇다 할 평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그 오륙만이 되는 인구가 어떻게들 살아가나요!” “그러니까 그럭저럭이란 말이 있는 게 아닙니까!” 그들은 점잖게 소리내어 웃었다. “원, 아무리 그렇지만 한 고장에 명산물 하나쯤은 있어야지.” 웃음 끝에 한 사람이 말하고 있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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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우리는 언제나 어디론가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설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인 김승옥의 무진기행, 그 첫대목을 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우리가 아침가 저녁 한밤중을 가리지 않고 양식을 일용하듯 바라고 가는 곳은 언젠가 우리가 떠나온 곳 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 또 우리가 바라고 가는 곳, 그곳의 특산물, 명산물은 무엇일까요? 헛개나무,오미자, 취나물, 마른 오징어 그런 거는 말고, 귀신이 뿜어내놓은 입김이라도.

 

-성석재의 <맛있는 문장/무진기행 첫 대목>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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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의 수필 생각>

 

김승옥은 무진의 안개를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이라고 했다. 순천만의 안개를 이토록 사실적으로 묘사한 문장이 또 있을까. 시인 김지하는 이 문장을 두고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극찬을 했다. 성석재는<맛있는 문장>에서 '귀신이 뿜어내는 입김'이라고 소개했다. 


                                          *카페<이상렬의 수필감상>에서 (cafe.daum.net/mbctnv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