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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목성균의「누비처네」를 읽고

by 안규수 2015. 6. 22.

누비처네

                                                                                                                                                            목성균

 

 

  아내가 이불장을 정리하다 오래된 누비처네를 찾아냈다. 한편은 초록색, 한편은 주황색 천을 맞대고 얇게 솜을 넣어서 누빈 것으로 첫애 진숙이를 낳고 산 것이니까 40여 년 가까이 된 물건이다. 낡고 물이 바래서 누더기 같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시골에서 흔치 않은 귀물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어?”

  내가 반색을 하자 아내가 감회 깊은 어조로 말했다.

  “잘 간수해서 그렇지.”그리고 이제 버릴까요?” 하고 나를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그건 분명히 누비처네에 대한 나의 애착심을 알고 하는 소리다. “놔둬.”그러자 아내가 눈을 흘겼다. ‘별수 없으면서-’하는 눈짓이다. 그것은 삶의 흔적에 대한 애착심은 자기도 별수 없으면서 뭘 그리 체를 하느냐는 뜻이다.

 

   나는 아내의 과단성이 모자라는 정리정돈을 비아냥거리는 경향이 있다. 버릴 물건은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데 아내는 그걸 못한다. 그래서 가뜩이나 궁색한 집안에 퇴직한 세간들이 현직 세간들과 뒤섞여 구접스레 했다. 그 점이 못마땅해서 나는 늘 예를 들어서 지적했다. 사실은 그 예가 아내에게 고의적으로 모욕을 가하는 것이긴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삶의 흔적들에 대한 애착에서 놓여나게 하려는 내 나름의 충격요법이지 솔직히 모욕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장터거리 박 중사 미치광이 마누라는 늘 일본 옥상 오비처럼 보따리를 두르고 다니는데 그걸 풀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었어. 이빠진 얼레빗서부터 빈 동동구리무 곽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 없데. 자기 세간 모아 두는 건 흡사 박 중사 마누라 잡동사니 주워 모으는 버릇 같아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내는 모욕을 느꼈는지 안 느꼈는지 오히려 역습으로 내게 모욕을 가하는 것이다.

  “남자가 박 중사 미친 마누라처럼 중중거리지 좀 말아요. 체신머리 없게시리-.”

  박 중사의 미친 마누라는 늘 허리에 예의 보따리를 두르고 머리에는 들꽃을 꽂고 길거리를 중얼거리면서 다녔다. 내가 박 중사 미친 마누라 허리에 두른 보따리로 장군!’하면 아내는 침을 흘리듯 중얼거리는 미친 짓을 가지고 멍군!’했다. 매사에 내가 부른 장군은 아내의 멍군에 당했다.

  아내가 들고 버릴까요.” 하는 누비 포대기는 내 인생의 사적(史的) 인 물건이다. 아내가 그 처네 포대기를 들고 버릴까요하고 묻는 것은 내 비아냥에 대한 잠재적 감정의 표출이다.

  

  아내가 첫애 진숙이를 낳고 백일이 지나도록 나는 아기를 보지 못했다. 서울에서 인쇄업(실은 프린트사였다)을 하고 있었는데 자리를 못 잡고 허둥지둥 승산 없는 분발을 계속하고 있었다. 사업 수완이 모자라는 때문이었다. 이미 자갈논 한 두락 쯤 게눈 감추듯 해먹고 이업을 할 건지 말 건지 망설이는 중이었다. 아내의 산고를 치하하려 집에 갈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추석 밑에 아버님의 준엄한 하서(下書)가 당도했다.

  인두겁을 쓰고 그럴 수가 있느냐고 힐책하신 연후, 제 식구가 난 제 새끼를 백일이 넘도록 보러 오지 않은 무심한 위인은 이 세상 천지에 너 말고 없을 것이라고 명의 (名義)침 놓듯 내 아픈 정곡을 찌르시고, 만일 이번 추석에도 집에 오지 않으면 내 너를 자식으로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당신의 마음을 천명하셨다. 그 준엄한 하서에 동봉된 소액환 한 장과 말미의 추신(追伸)이 마침내 불민한 자식을 울렸다.

  

  추신은 추석에 올 때 시골서는 귀한 물건이니 어린애의 누빈처네 포대기를 사오라는 당부 말씀이었다. 소액환은 누비처네 값이었다. 그러면 네 식구가 좋아할 거라는 말씀은 안 하셨지만 사족을 생략한 것일 뿐 그 말이 그 말이다. 아버지는 객지의 자식이 제 새끼를 보러 오지 못하는 실정을 아시고 궁여지책을 쓰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믿을 도리밖에 없는 맏자식이니 아버지도 늘 연민 정도는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자식에 대한 연민, 그게 얼마나 부모의 큰 고초인지 내가 당시 아버지 나이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오죽하면 소액환을 동봉 하셨을까. 그 소액환은 돈이라기보다 슬하에 자식을 불러 앉히는 아버지의 소환장이나 마찬가지다. 용렬하기 그지없는 자식에게 아비 노릇, 남편 노릇 하는 방법까지 일일이 일러 주어야 하는 아버지의 노파심을 생각하니까 불효자는 웁니다하는 유행가처럼 서러웠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 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아버지는 푸른 달빛에 흠뻑 젖어 아기 업은 제 아내를 데리고 밤길을 가는 인생 노정에 나를 주연으로 출연시키신 것이다. ‘임마, 동반자란 그런 거야하는 의미를 일깨워 준, 아버지는 탁월한 인생 연출자였다. 처네 포대기가 그 연출의 소도구인 셈이었다.

  그때 그 처네 포대기 아버지께서 사오라고 돈을 부쳐 주셔서 사온 거야.” 내가 이실직고 하자 아내가 알아요.” 했다. 그러고 말하기를 추석대목 밑에 어머니가 아기 처네 초대기 사게 돈을 달라고 하자 아버지가 묵묵부답이셨다는 것이다. “며느리를 친정에 보내려면 애를 업고 갈 포대기가 있어야 하잖아요.” 하고 성미를 부리자 아버지가 맞받아서 애 아비가 어련히 사올까하시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아내는 그때 시아버지께서 무심한 신랑과 친정을 보내 주실 모종의 조치를 꾸미고 계시다는 것을 눈치 채고 가슴을 두근거렸다고 한다.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때 내가 아내의 손을 잡았던 모양이다. “그때 내 손을 꼭 잡던 자기 얼굴을 보니 깎아 놓은 밤톨 같았어.”아내가 누비처네를 쓸어 보며 꿈꾸듯 말했다. 참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칭찬이었다. 아마 그때 내게 손을 잡힌 걸 의미 깊이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두 남녀가 이루어 가는 우리라는 단위의 인생은 단순한 연출의 누적에 의해서 결산되는 것인지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성의만 있으면 가능한 연출을 우리들은 못하든지 안 한다.구닥다리 세간에 대한 아내의 애착심은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을 연출한 소도구이기 때문이다. 이제 아내의 애착심을 존중해야지, 누비처네를 보면서 생각했다

                                                                                                                                                                                        「누비처네 전문

 


이 글을 읽고

  - 아름다운 만남

  

  목성균님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이 글은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불민한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이글에서 가족 사랑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행복했다. 그 행복이란 글속 행간에 숨어 있는 사부곡이 처절 하리 만큼 내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글속의 아버지는 곧 내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에게 아버지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면서도 가부장적인 유교적 사고방식 속에 자란 그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는 항상 아버지에게 인정받는다는 것에 목말라했다.

 

지금도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러나 믿을 도리밖에 없는 맏자식이니 아버지도 늘 연민 정도는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 한다.자식에 대한 연민, 그게 얼마나 부모의 큰 고초인지 내가 당시 아버지 나이에 이르러서야 알았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평생을 어깨에 진 돌처럼 자신을 짓누르던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아버지는 그의 인생 드라마의 연출가였다. 이 글에서도 누비처네라는 소도구를 사용해서 그를 주연으로 출연 시켜 멋진 한 편의 드라마를 완성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진 유물이 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어려서 포대기란 이름의 누비처네로 엄마나 누나 등에 업혀 자랐다. 누비처네, 어찌 이글 저자만의 사적(史的) 인 물건이겠는가?

이글을 읽으면서 나를 행복하게 한 것이 또 있다.

 

'장터거리 박 중사 미치광이 마누라는 늘 일본 옥상 오비처럼 보따리를 두르고 다니는데 그걸 풀면 온갖 잡동사니가 다 들었어. 이빠진 얼레빗서부터 빈 동동구리무 곽에 이르기까지 없는 것 없데.’

 

이빠진 얼레빗동동구리무’, 이 두 단어는 무척 낯익은 낱말이다. 이 글을 읽다가 이 단어들을 발견한 순간 어머니를 만난 듯 반가웠다.  어머니는 아침이면 머리를 감고 이빠진 얼레빗으로 머리를 빗으셨다. 어머니의 단 하나 뿐인 화장품인  동동구리무는 평소에는 안 바르고 시장에 가실 때나 특별한 날만 거울을 들어다 보면서 얼굴에 바르셨다.  구리무는 크림의 왜식 발음이다.  뇌리에서 잊혀진 이 단어는 나의 향수를 자극했다. 가신지 어연 30년이 다 된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해 눈시울을 적셨다.

 

추석을 쇠고 우리는 아버지의 명에 의해서 근친을 갔다. 강원도 산골 귀래 장터에 도착했을 때 이미 한가위를 지낸 달이 청산 위에 둥실 떴다. 그때부터 십 리가 넘는 시골길을 걸어가야 한다. 아내는 애를 업고 나는 술병과 고기 둬 근을 들고 걷기 시작했다. 아내 옆에 서서 말없이 걸었다. 달빛에 젖어 혼곤하게 잠든 가을 들녘을 가르는 냇물을 따라서 우리도 냇물처럼 이심전심으로 흐르듯 걸어가는데 돌연 아내 등에 업힌 어린것이 펄쩍펄쩍 뛰면서 키득키득 소리를 내고 웃었다. 어린것이 뭐가 그리 기쁠까. 달을 보고 웃는 것일까. 아비를 보고 웃는 것일까. 달빛을 담뿍 받고 방긋방긋 웃는 제 새끼를 업은 여자와의 동행,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 구체적으로 알았다.’

 

  이 대목을 평론가 김종완님은 한국 문학이 만들어 낸 가장 아름다운 광경으로 평가하고 있다. 마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이 동이와 함께 나귀를 끌고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달밤의 산길을 걷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아이를 업은 아내와 신랑이 냇가를 끼고 가을 들녘을 걷는다. 추석 대보름 달빛이 너무 영롱하다. 그때 등에 업힌 어린 것이 펄쩍펄쩍 뛰며 키득키득 웃는다. 아이가 달빛과 놀고 있다. 달빛을 담뿍 받고 제 새끼를 업은 아내와의 동행, 그는 행복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구체적으로 느낀 것이다. 저자는 그때의 심리적 묘사를 교교한 달빛 아래 냇물도 흐름을 멈추고 잠든 것 같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날 밤 어린 아내는 신행 길에서 손을 꼭 잡아 주는 깎아 놓은 밤같은 신랑 얼굴에서 평생 가슴속에 품고 살아 온 '사랑'을 처음으로 느낀 것이다.

  「누비처네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가족이란 이름의 인연이 맺어 준 끈끈한 사랑이다. 그는  젊은 한 때의 이야기를 문학에 휼륭히 접목하여 성공한다. 그는 현실의 삶에서 추억을 하나하나를 새로운 만남으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수필문학'에 심취하여 열중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