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번화가에는 예외 없이 육교가 꺾쇠처럼 걸려 있다. 무대 위에 세트를 물고 버티고 있는 그놈처럼 말이다.
서울은 확실히 서구풍으로 곱게 단장한 한 폭의 탈동양의 세트다. 무수한 ‘피에로’들이 그 주변을 울긋불긋한 화장술과 복장을 자랑하며 초만원의 대성황에 사례하는 북소리, 나팔소리에 정신이 아찔하다. 가끔씩 치마저고리와 갓과 도포자락이 유령처럼 펄럭거리기도 하지만, 그것들은 오늘의 서울에서는 부도덕이다. 거추장스럽고 식어빠진 된장국 냄새와 고리타분한 파김치 냄새까지 풍겨서 초현대를 레몬주스처럼 빨고 사는 서울의 한국인에게는 마음이 언짢다.
육교는 누가 고안해 냈는지 모르지만 다분히 다목적이다. 첫째 나같이 다리가 허약한 사람을 위해서 아침저녁 출퇴근할 때 잠깐이나마 다리운동을 하게 만들어 놓은 등산 대용기구로 이용되니 자못 고마운 일이다. 또한 육교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기분은 고봉준령에서 천인단애를 굽어보는 맛과는 또 다른 상쾌함이 있다. 4,5미터 높이의 육교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크고 작은 자동차들의 탁류, 그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러시아워의 계곡에서 물매미들처럼 허우적거린다. 시냇가에서 고무신짝으로 덮쳐 세숫대야 물에 담가 두면 빙빙 맴을 돌면서 귀엽게 재주를 부리던 그놈들처럼.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별안간 육교 아래를 향해 방뇨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소방호스는 위로 향해 있지만, 나는 아래를 향해서 말이다. 힘차게 내리 퍼지는 소나기의 빗발은 첫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무지갯빛도 찬란하리라. 이런 심술 사나운 심리현상은 어느 심리학 책을 뒤져 보아야 할지 모를 일이다. 내가 이런 부도덕을 음모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포드․캐딜락․크라운․코티나 속의 신사 숙녀 제씨는 외국산 커피의 향긋한 미각만을 계속 반추하고 있으리라. 이렇게 쾌청한 날 아침이면 경비행기에라도 몸을 싣고 서울의 하늘을 한 바퀴 휭 날고 싶다.
내가 어렸을 때는 시골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친구들과 어울려서 남의 집 뽕나무에 자주 매달렸다. 까맣게 익은 왕벌 같은 오디를 따먹기 위해서다. 개구쟁이들 가운데는 예쁜 소녀들도 더러 섞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보다 동작이 빠른 소녀도 있었다.
어느 날이다. 아래 가지에서 오디를 따먹다가 우연히 쳐다본 광경은 너무나 황홀했다. 치마폭을 걷어서 모아 쥐고 오디를 따 담고 있는 소박한 한 폭의 풍속도가 바로 내 머리 위에 펼쳐져 있지 않은가.
나는 육교 계단을 오를 때는 되도록 시선을 외면한다. 내 앞을 기어오르는 미니스커트 아가씨들 때문이다. 나는 몹시 완고한 가정에서 자랐다. 선친께서 나의 장난스러운 내심을 꾸짖고 계시는 것 같아서다. 그러나 서울의 시민들은 심신이 피곤하다. 어린 시절의 뽕나무 가지 위에 펼쳐진 소박한 한 폭의 풍속도가 문득 겹쳐 떠오른다.
번화가에 위치한 육교 위에는 예외 없이 면세특허를 받은 잡상인들이 줄을 지어 늘어앉아서 양춘가절의 고양이처럼 행복하게 졸고 있다. 진열된 상품 종류는 시청에서 배급이나 받은 것처럼 한결같다. 빗․귀이개․거울․의자다리의 고무받침 등. 그러나 이런 것들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중요한 품목이 하나 있다. 이것은 필시 로댕의 조각이다. 움직이지 않는 조각이다. 옆에 둔 맥스웰하우스 깡통과 함께 찌푸린 얼굴로 명상에 잠겨 있는 그 얼굴 모습은 흡사 등신불을 연상케 한다. 억겁을 고뇌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때 묻은 바짓가랑이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서 정강이를 세운 한쪽 다리는 더덕더덕 부스럼투성이다. 다갈색 수액이 번져 나와서 찬란한 오월의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다. 어떤 여학생은 코를 쥐고 도망간다. 토끼처럼 하얗게 분을 바른 시골 처녀는 감상에 젖어 동전 한 푼을 쨍그랑 던져 주고 간다. 국산 유행가처럼 슬픈 표정을 하고. 나는 던져 줄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지? 대신 위대한 창조주의 잉여작품인 당신 구걸주에게 이름이나 하나 지어 줄까. 국전 출품작 조각 ‘작품 B’라고.
나는 어렸을 때 감나무에서 떨어진 일이 더러 있다. 바로 머리 위에 잡히는 놈보다는 낭창거리는 가지 끝에 매달린 놈이 더 맛있게 보인다. 한사코 그놈을 낚아채기 위해 바둥거리다가 결국 미끄러져 낙상하고 만다. 그러나 감나무 아래는 폭신한 풀밭이어서 다행히 골절상은 면한다.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다 보면 그만 몸살이 나서 드러눕고 만다.
서울의 땅바닥에는 풀포기 하나 찾아볼 수 없다. 딴딴한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 서울의 어린이들은 올라가서 놀 감나무 하나 없다. 그리고 폭신한 풀밭에 누워 우러러볼 푸른 하늘도 없다.
광화문 교육회관 앞 육교 난간에는 빨래판만한 돌에 새겨진 묘비가 하나 상표처럼 걸려 있다.
여기 건너다 아쉬이 숨져 간
어린 넋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1966년 11월 6일 김현옥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의 한 구절을 생각게 한다.
-공동묘지를 지날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15세의 약년으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는 누워 있음’이란 묘표를 읽을 때, 아! 그는 어렸을 때 단짝동무의 한 사람 -
번잡한 길을 건너려다 비명에 숨져 간 그 어린이는 저 세상에서 장난스러운 어른들을 또 한 번 원망하고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폭신한 풀밭에서 강아지들과 장난치며 놀게 두지 않고 왜 이렇게 높은 시멘트 난간에다 나를 매달아 놓았는가.’고. 그 어린이는 당장에라도 뛰어내리고 싶어 발버둥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육교 아래에는 풀 한 포기 없는 차디찬 시멘트 바닥이다. 육교 난간에는 빨갛게 익은 감도 하나 열려 있지 않다. 다만 오고가는 어른들의 무딘 구두 발자국 소리만이 어린 넋의 골을 쿵쿵 울리고 있을 뿐이다.
출처 :그린에세이 원문보기▶ 글쓴이 : 이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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