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등산화
이 상 렬
제13회 산림문예대전 우수상
잊을 수 없는 물건은 지워지지 않는 장면의 다른 이름이다. 산길은 하나하나의 기억을 되살려 내며 먼저 지나간 발자국을 멈추게 했다. 지극히 평범한 녹음이 싸여 있는 어느 여름날, 산에 올랐다. 쏟아지는 햇빛은 어깨 위에서 천근의 무게로 느껴진다. 새마저 울지 않았다면, 초롱꽃이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더 잔혹한 산행이 될 뻔했다. 산기슭에서부터 후끈후끈 발바닥에 열이 나기 시작했다. 등산화 밑이 마치 마분지 한 장 깔아놓은 듯, 울퉁불퉁한 땅 표면을 무방비로 발바닥에 전달하는 느낌이다. 발바닥이 쓰라리고 화끈거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등산화가 화근이었다. 생전에 아버지가 신었던 등산화다.
아버지의 등산화가 불현 듯 아득한 지난시절로 데려다놓는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 둥지에 탁란하고 살던 시절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등산용품매장을 찾았다. 진열대 위에 놓인 등산화 한 켤레를 유심히 보시더니 몇 번이고 들었다 놨다 망설이신다. 나는 선뜻 계산대 앞으로 가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그 등산화를 내려놓으시고 싸구려 한 켤레를 선택했다. 꼬깃꼬깃 구겨진 쌈짓돈을 펴신다. 장성하고도 무력한 자식이 혹여 마음이라도 쓸까 등을 돌려 계산하신다. 가게를 나서면서 슬쩍 확인했다. 만 오천 원이었다.
시골 벽지 학교의 교사로 평생 근무하면서 하늘과 바람, 흙과 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 그날 화단을 손질하신 후, 집무실에서 앉은 채 꼿꼿한 생生을 마감하셨다. 유품을 정리하든 중, 흙이 묻은 아버지의 싸구려 등산화를 발견했다. 퇴직을 앞둔 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처럼 기름기가 다 빠진 채 앙상하게 놓여 있었다.
생전에 더 잘해 드리지 못한 것들이나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들, 또 하지 못한 말들이 가슴속에서 불꽃처럼 툭툭 터진다. 아름다웠던 추억보다 쓰디쓴 장면만 기억의 한편에서 서걱거린다.
우지끈, 발을 헛디뎌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밟았다. 그 서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발바닥의 쓰라림보다 더한, 가슴에 멍울진 그 무엇이 뜨겁게 치밀어 올라왔다. 아버지도 이렇게 아팠을까. 제대로 된 등산화 하나 사드리지 못한 미안함이 송곳같이 가슴을 찌른다.
신을 벗었다. 거친 세월이 담긴 앙상한 등산화에서 아버지가 남겨놓은 체온이 느껴진다. 한 뼘의 발바닥 안에 치열했던 격정의 한 생애가,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새벽 미명, 잠에서 깨어 뒷산 오솔길을 홀로 걸으며 앙다물었을 중년의 고독, 일몰을 바라보며 삼켰을 가슴속 쓸쓸함이 배어 있다.
다시 등산화를 신었다. 아버지와 내가 발바닥으로 만나는 순간이다. 과거와 현재가 만나듯, 먼저 간 아버지의 발바닥과 지금의 내 발바닥이 닿는다. 생전에 이렇게 밀착된 적이 없었기에 가슴이 뜨거워진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저 눈앞의 구부러진 길만 돌면 내달릴 수 있는 길이 펼쳐져 있을까. 이 언덕만 넘으면 잠시 숨 돌려 쉴 수 있는 너럭바위라도 하나 나올까. 아버지가 올랐을 인생의 산도 다를 바 없으리라. 들숨과 날숨을 바람과 주고받으며 조여드는 힘겨운 숨을 참았을 아버지, 험한 산과 같은 치열한 세상, 천 길 낭떠러지 같은 경쟁의 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날 때마다 손에 쥔 삶의 지팡이를 놓아 버리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
잠시 멈추고 위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는 산은 아버지가 못다 한 남은 생애처럼 숭엄하다. 이렇게 생을 잇는 것이 부모와 자식 사이던가. 앞만 보고 묵묵히 생의 고비를 넘긴 그 길을 이제 내가 아버지의 신을 신고 인생의 고갯마루를 넘을 차례다.
고통을 느끼며 오를수록 아버지와의 대화가 깊어진다. 아픔마저 익숙해진 것일까. 서서히 통증이 멎어간다. 어느덧 나도 아버지의 생을 닮아가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오는 이 없는 먼 산을 멍하니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자식들이 각자의 방에 들어가 제 울타리를 치고 있을 때, 새가 떠난 빈 둥지 같은 휑한 거실에 홀로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내가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처럼.
아무도 없는 사이 잠시 펼쳐 보였다가 사라진 무지개처럼 아름다웠던 적이 있었던가. 시간은 극치의 사랑을 기다려주지 않듯이 전하고픈 내 서툰 마음이 절정에 다다랐을 때, 아버지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생애 최고의 불꽃은 그 사람이 없는 사이에 잠시 솟아올랐다가 사라지는 것이듯, 최고의 의미는 언제나 뒤늦게 찾아오는 것인가 보다. 아버지의 부재를 통해 느끼는 부정父情은 다시 올 백 년의 세월보다 깊고도 길다는 것을 알았다.
세상은 아직 준비되지 않은 나에게도 아버지란 명찰 하나를 가슴에 달아주었다.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하고 맞이한 아버지의 자리, 그 자리에는 여전히 어린아이가 앉아 징징거린다. 누구라도 가까이 있으면 나를 좀 돌봐 달라고 최후 항전으로 엉엉 울음을 터트릴 무렵, 나는 아버지의 한 생애가 흙먼지처럼 묻어 있는 등산화를 신게 된 것이다. 바닥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아버지로부터 아버지를 배워가고 있다.
산을 내려왔다. 아버지의 등산화를 벗는다. 이제 내게 주어진 나의 아버지 길을 홀로 걸어야 할 때이다. 아버지와 함께 하나의 공간 속에 있다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지만, 서로 다른 시간 속에서도 당신의 숨결이 담긴 세월을 계승하며 산다는 것 또한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이겠는가.
이렇게라도 내 기억의 돋보기 속에서 잊혀 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하고 싶다. 하늘을 버리고 떨어지는 나뭇잎 소리를, 산을 쪼아 대는 지빠귀 소리를, 아버지 발밑에 밟혔을 풀잎 꼼지락거리는 소리를.
벗어 놓은 아버지의 등산화가 늘 그렇게 사셨던 아버지처럼 푼더분하게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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