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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임재하시는 하나님’

by 안규수 2017. 5. 11.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어제는 많은 분들이 잠을 설치셨을 듯 합니다. 

새롭게 출발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새 정부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이 땅과 열방에 세워나가는 통로가 되길 간절히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오늘 아침은 제가 존경하고 제 신앙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토저목사님의 <들을 귀 있는 자들은 들이라>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시다는 교리를 아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지금 이 시대는 ‘부재자 하나님’의 시대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듯 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현재 곁에 있는 분’에 대해 말하듯 하는 경우는 드물다. 
더욱이 그분께 말씀 드리는 사람, 즉 기도하는 사람은 더욱 드물다.

그러나 아기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만족할 수 없듯이, 
태양이 없으면 지구상의 삶이 가능하지 않듯이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만족하거나 건강할 수 없기 때문에 
그에게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분 없이도 잘 살아가는 것이 그분의 본래 뜻이었다면, 
그분의 임재를 꼭 필요로 하는 존재로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다! 
성경과 우리의 도덕적 이성은 그분의 임재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 목소리로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피해 나무들 사이에 숨었다. 
자신들에게 그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두려움과 당혹감 때문에 일시적으로 망각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선 죄인의 마음은 언제나 편하지 않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요나는 그분의 임재 앞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갔다. 
자신의 개인적 죄를 날카롭게 의식한 베드로는 주님의 면전에서 도망하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주님께서 떠나주시기를 간청했다.

인간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만, 막상 그분 앞에 서면 편하지 않다. 
이것은 죄가 우리 안에 만들어놓은 ‘도덕적 자기모순의 심리’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지만 멀리 떨어져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편하게 가질 수 있다는 개념은 어떤 기독교 교파의 교리 선언에도 나와 있지 않다. 
이런 교리를 믿는다고 감히 인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경건한 신앙인들은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기피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속의 믿음을 더 잘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신조가 아니라 우리의 행동, 특히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말이다.

이런 우리의 언행에 근거해 판단할 때 나는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저쪽을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이 지금 여기에 계시지 않다고 믿는 사람들은 
완전히 악한 짓이 아니라면 그분이 눈감아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이런 잘못된 믿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그들이 오늘날 기독교계에서 그토록 많은 허튼 짓을 주님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사역을 위한 계획을 세우느라 너무 바쁜 사람들은 세상을 복음화하고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하나님의 방법이 성경에 나와 있다는 사실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다. 
하기야 ‘부재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일을 자기들에게 맡기고 멀리 떠나 버리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어찌 그런 생각이 나겠는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심한 경우는 틀에 박힌 것처럼 인습적인 교회들이다. 
내가 볼 때, 교회들의 그토록 많은 예배를 견딜 수 없을 만큼 지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이 자리에 계시지 않는다고 믿는 뿌리 깊은 생각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임재하시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모인다면, 
그 집회가 형편없는 모임으로 전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분의 달콤한 향기가 집회 장소를 가득 채운다면 아무리 재미없는 설교라 할지라도 즐겁게 견뎌낼 수 있겠지만, 
‘부재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는 그 무엇도 그 모임을 구할 수 없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A. W. 토저 / 규장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가까운 데에 있는 하나님이요 먼 데에 있는 하나님은 아니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장 23,24절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시편 139편 7~10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멀리 계신 것처럼 마음대로 행했던 죄를 회개합니다. 
지금도 제 안에서 살아계시며 저와 동행하시는 하나님, 
늘 충만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왜 빨리 이뤄주시지 않지?'
'왜. 나를 가만히 나두시지?'
'하나님은 나의 원함을 모르시나?'
'하나님.. 왜.. 나한테 이러시지?'

요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 안에 조급한 마음이 있음을 
보게 되었죠. 
말씀을 통해. 기독교 서적을 보고. 생각이란걸 해보니.. 
조급할 때는 왠지 하나님께서 기다리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조급함을 내려놓고. 준비가 되어야.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흐믓한 표정을 지으시며
뭔가 하실 것 같은..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마치 나를 위해 완벽하게 준비하신 코스요리를 
함께 먹는것 같아요. 
너무 배가 고프다고해서. 
조급해 한다고 해서. 
배고프다고 소리를 질러도..
귀한 음식은. 메인은. 빨리 나오는게 아니잖아요.  

천천히. 

나를 위해 준비하신 
맛있는 코스요리를 기다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이런저런 애기를 나눠보는건 어떨까 싶어요. 
그렇게.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거예요. 

천천히요. 

그리고. 
하나님은 나에게 좋은 것을 주실거란. 
신뢰함과 함께요,

오늘도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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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잠 3:27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한 학생이 길을 가다가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를 봤습니다.

그러나 돈이 없던 학생은 아침에 엄마가 싸준 따스한 도시락을 주고 가방에서 얇은 담요를 꺼내 노숙자에게 주었습니다.
이때 이 장면을 목격한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큰 감명을 받은 남자는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이 얘기를 해주었는데, 아내도 큰 감동을 받았습 니다.
학생은 주었고, 노숙자는 받았고, 남편은 목격했고, 아내는 들었습니다. 
모두 다른 경험이지만 심리학자들의 실험에 따르면 이들의 몸과 뇌 에서는 같은 반응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선행에 관련된 사람들은 옥시토신이 나와 심장이 튼튼해지고, 
세로토닌이 나와 행복감을 느끼고 면역력이 증가됩니 다. 
그리고 활성산소가 줄어들어 노화를 예방하고 스트레스와 불면증이 사라집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이며, 목사님인 매슬로우는 이런 현상을 ‘피크의 체험’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피크의 전염은 모든 사람들을 승자로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감정의 상태라고 정의했습니다.

한 번의 선행은 나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퍼져 나가고, 
베푼 노력 이상의 보상이 되어 돌아옵니다. 
주님이 주신 은혜로 용기를 내어 오늘 단 한 번의 선행이라도 실천해보 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길을 가다 어려운 사람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게 하소서.
선한 일을 행하고, 또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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