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저는 하노이에서 아침을 맞고 있습니다. ^0^
어젠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여행을 오신 지인을 만났는데요,
바쁜 일정에도 잊지 않으시고 찾아 주시고 귀한 선물까지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제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음성을 들려 주시는 듯 했습니다.
"넌 잊혀지지 않았단다...."
내가 평생 사는 동안 새벽 일찍 일어나는 것은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날 때 기분은 소학교 때 소풍가는 날
아침 가슴이 설레는 것과 같다.
고 정주영회장의 고백이라고 하네요~
이 말을 접하면서 어떠세요? 제겐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0^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 매일 함께 하시고 자신을 통해 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설레임으로 열어가시나요?
저는 하루 하루를 고통스럽게 열어가는 날이 솔직히 더 많았던 제 모습을 보면서...
제 연약한 믿음의 자화상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듯 합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은 이찬수 목사님의 <왜 그를 쓰셨을까?> 라는 제목의 글을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를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시 78:70,71
본문에서 우리가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주권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다. 주권적으로 다윗에게 다가가셨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다윗을 불러주셨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다윗이 어디에 있을 때, 무엇을 할 때 부르셨는가? 양의 우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님은 삶의 현장을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모여 정결한 예배자로 예배를 드리는 모습도 귀하게 보시지만,
엿새 동안 우리가 지내는 삶의 현장을 굉장히 귀하게 보신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는 자신의 생업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부름을 받은 경우가 의외로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베드로 아닌가?
베드로는 어부로서 고기 잡는 그 생업의 현장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다 포커스를 맞추고 계시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결과만 중요하게 보시는 지도자이셨다면 베드로는 예선 탈락이다.
밤새 애를 써도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한 실패한 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점은 그가 얼마나 성공했나, 얼마나 많은 고기를 잡았나에 있지 않았다.
그 힘든 실패의 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이다.
베드로보다 더 놀라운 경우가 세리 마태이다. 예수님은 그를 어디서 부르셨는가?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 9:9
이건 사실 난센스다. 마태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악이다.
그 당시 세리는 자기 동족을 착취하는 게 일이었다.
그래서 일을 열심히 하면 오히려 안 될 것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비록 자기 동족들을 착취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뽑으셨다.
이제 헷갈리기 시작한다. 굉장히 혼란이 온다.
이 혼란의 극치는 바울을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나타난다.
바울은 부르면 안 되는 인간이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이 참 이상하다.
아니, 그 당시에 잘 준비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준비된 그대로 쓰시면 되는데, 뭐 하러 이런 못된 놈을 선택하셔서
부르시는 것에서부터 다듬어서 쓰시기까지 그 복잡한 과정을 거치시는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큰 에너지 들여서 빛을 내리시고, 눈멀게 하시고,
꼬꾸라지니 사람까지 보내시는 등 이 복잡한 조치를 취하신 것일까?
‘예수님은 왜 바울을 쓰셨을까?’
이 부분을 생각할 때마다 이것이 늘 의문이었다.
그런데 바울을 보니 사람 핍박하는 일이 자기가 해야 할 일이면 목숨 걸고 핍박했다.
그런 바울을 보면서 혹시 예수님이 이런 생각을 하신 것은 아닐까?
‘저 사람이 지금 비록 판단을 잘못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만,
저 정도 열심이라면 바르게 가르치고 교정해주면 하나님나라를 위해 멋지게 쓰일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기준이셨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이라면, 우리가 결과를 아는 것처럼 대박 아닌가? 바울이라는 대박이 터졌다.
나는 기왕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아 이 자리에 섰다면 무기력증에 빠져 있는 자들이 없기를 바란다.
하나님 앞에 한 번 부름을 받아서 쓰임 받고 싶다면 주어진 일에, 삶의 현장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목회하는 일이면 목회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의사면 환자 치료하다가 죽을 사람처럼,
교사면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교단에서 쓰러질 사람처럼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다는 것이다.
에클레시아 : 부르심을 받은 자들, 이찬수 / 규장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 마태복음 25장 21절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 사도행전 20장 24절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 로마서 12장 11절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살전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인도의 비하르 주에는 다시랏 만지라는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만지의 아내가 하루는 일을 하다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데,
전화조차 놓여있지 않은 시골이라 만지는 아내를 업고 병원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쉬지 않고 달렸으나 병원까지의 거리는 무려 50km이었기에 결 국 아내는 중간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만지는 자기 같은 희생자가 또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마을과 병원 사이를 막고 있는 돌산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산을 가로지르면 병원까지는 거리는 10km로 몇 배나 가까워졌기 때문인데
경사도 높고 풀 한 포기 없는 돌산이라 너무나 무모한 행동이었습 니다.
그러나 만지는 22년 동안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9미터 높이의 돌벽은 8미터 폭을 가진 110미터의 길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길 을 통해 훨씬 수월하게 병원을 갈 수 있게 되었고,
만지는 ‘마운틴맨’으 로 사람들에게 불리며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는 비 하르 주에서 주관을 해 아주 성대하게 장례식을 치러주었습니다.
만지가 22년 동안 산을 깎은 이유는 다른 사람이 아픔을 겪게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웃을 위한 사랑의 실천은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작은 결심과 봉사라도 시작하십시오.
반드시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주님! 이웃의 필요에 민감하고 이웃을 도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고난의 극복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십시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아들의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슴 뛰는 삶을 살아라 (0) | 2017.05.16 |
---|---|
주님! A입니까? B입니까? (0) | 2017.05.13 |
‘임재하시는 하나님’ (0) | 2017.05.11 |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0) | 2017.05.09 |
샘물을 쏟고 마음을 얻다 (0) | 2017.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