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대문
심선경
헐거운 나무 대문이 삐걱거린다. 군데군데 나뭇결이 쩍쩍 갈라져 성긴 틈사이로 바깥 풍경이 수시로 드나든다. 조심스럽게 여닫지만 대문은 항상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었다. 문간방 아이는 바깥출입을 할 때마다 주인집 눈치가 보였다. 셋방 구할 때 아이들 숫자가 많다고 방을 선뜻 내주지 않던 집주인에게 사정사정해서 들어오다 보니 조심스럽기는 부모님들이 더하였지 싶다.
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은 무엇보다 참을성이 있어야 하는데 주인집 아이와 셋집 아이가 싸웠을 때는 특히 그렇다. 아무리 자기 집 아이가 힘이 세고 잘났다 해도 절대로 주인집 아이를 이겨먹게 내버려둬서는 안 된다. 어쩌다 그런 일이 생기면 잘잘못을 가리기도 전에 어머니는 마당에 세워둔 빗자루로 내 등짝을 먼저 후려쳤다. 억울한 심정에 방에 들어와 그 아이의 잘못을 일러바치면 “너 내일 또 이사 가고 싶냐?” 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은 정리되었다.
아버지가 늦은 저녁까지 집에 들어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면 어머닌 자투리 천을 잇대어 만든 오색 밥상보로 저녁상을 덮어놓고 미리 대문밖에 나가 진을 쳤다. 이제껏 오지 않는다는 것은 필시 술자리가 벌어졌다는 이야기일 터, 혹시라도 빨리 대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취기에 대문이라도 걷어차면 어쩔까하는 마음에서였다. 앉은뱅이 책상에서 남은 숙제를 하고 있노라면 골목 저 끝에서부터 아버지의 둔탁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온다. 굳이 발소리를 확인하지 않더라도 음정 박자를 무시하며 고래고래 악쓰는 듯한 노랫소리가 먼저 아버지의 행차를 알려왔다.
“아~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으을 이-인가아--요? ”- 이 신호가 들려오면 동생과 장난치던 오빠는 짐짓 상기된 얼굴이 되어 바깥으로 얼른 뛰어나갔고, 더딘 숙제를 하던 내 연필심은 갑자기 열 칸짜리 노트를 두 칸씩 질러갔다. 골목 입구로 달려 나가 비틀거리던 아버지를 부축해오는 어머니는 제발 조용히 하라고 입에다 검지 손가락을 몇 번이나 들이대며 아버지의 고성방가를 저지했다. 이쯤 되면 주인집에서 현관문을 와락 열고 또 시작이라는 듯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내고서는 문을 야멸차게 닫고 들어간다.
문간방에 살 때는 아버지의 술 한 잔이 곧 비상 발령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외할머니 댁에 갔을 때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날은 웬일인지 아버지가 노래도 부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문을 빨리 열지 않는다고 대문을 발로 차며 큰소리를 냅다 질렀던 것이다. 급기야 주인집에서 나오고 술 취한 아버지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주인집 아줌마는 당장 방 빼라고 고함을 쳤고 아버지는 더러워서라도 나간다며 아무 죄도 없는 대문을 분풀이하듯 걷어차며 맞장을 떴다. 내일 쫓겨 날 생각을 하면 내심 걱정이 앞섰지만 밉살스러운 주인집을 향한 아버지의 반격이 여간 통쾌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만큼 아버지가 커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었다.
다음 날, 어머니가 돌아와 사태를 파악한 뒤 코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조아려 주인집에 사과하고 나서야 이 사건은 잠잠해졌다.
얼마 뒤에 주인집에서는 대문에 파란 페인트를 칠했다. 새 옷을 갈아입은 대문은 어쩌면 절망으로 가득 찬 그 집 안을 희망으로 바꿔놓는 듯한 착각에 들게 했다. 돌쩌귀도 새것으로 갈았는지 아무리 문을 여닫아도 대문은 이렇다 할 기척이 없었다. 유성페인트로 칠해진 대문은 자신이 입은 새 옷이 몹시 갑갑한 듯 보였다. 투박한 나뭇결은 그 날로 가쁜 숨을 몰아쉬며 덧칠된 색깔처럼 파랗게 질려가는 것 같았다. 파란 색깔이 낯설기라도 한 듯 맞은 편 집 강아지는 가끔씩 대문을 보고 생각없이 짖어댔다.
차라리 대문이 낡았을 때가 좋았다. 눈을 감고 들어와도 삐걱거리는 소리만으로 여기가 우리 집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대문은 한바탕 소동을 일으킨 뒤로 주인집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애써 눈길을 피해가는 아버지를 이따금씩 떠올리게 했다. 술기운에 당장 나가겠노라 큰소리는 쳤지만 그 겨울에 온 가족이 거리에 나앉을 생각을 하면 머리끝이 쭈뻣 섰을테고, 무엇하나 가족에게 의지가 되어주지 못한 좁은 어깨가 바람 불 때마다 낡은 대문처럼 흔들거렸으리라.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아무도 나를 ‘파란 대문집 문간방 아이’로 부르지 않는다. 다만 1705호 아줌마로 불리어질 뿐이다. 아버지의 뚝배기 깨는 듯한 노래 소리도, 술 취한 남편이 어서 돌아오길 기다리며 골목 끝을 향해 종종걸음 치던 어머니의 흰 고무신 소리도 이곳에서는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란 얼마나 세상을 삭막하게 하는가. 손가락이 기억하고 있는 한, 숫자로 된 암호 몇 자리를 습관처럼 누르면 문은 자동으로 열린다. 늦은 저녁, 비까지 추적거리며 내리는데 직장에서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나를 반기는 것은 차가운 강철로 된 아파트 쇠문일 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본래의 모습 위에 세상이 원하는 색깔로 덧칠되어 숨 막히는 시간을 보내고 온 나를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밖에 나간 사람이 들어오면 문을 열어줘야 한다는 이유로 황급히 대문 쪽으로 뛰어나가 술 취한 아버지를 맞이하였던 때는 그나마 따스한 사람의 정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언제까지 내 둔한 머리가 동굴 앞에 선 알리바바처럼 마법의 주문을 외울 수 있을까. 쇠문의 안쪽은 어둡고 공허하다. 빈 어둠을 밀며 현관에 들어서는데, 문간방 아이로 살았던 그 때의 긴 골목길이 뜬금없이 그립고, 움켜쥐었다 편 손바닥의 손금처럼 삐걱거리던 대문의 나뭇결이 새삼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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