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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신경숙,「모르는 여인들」

by 안규수 2013. 2. 15.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는 여자 친구들 몇몇이 만나 얘기를 하다가 연애를 할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게 화제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다들 좀 생각하는 눈치였는데 나는 곧바로 아니,라고 대답했다. 모두들 나를 봤다. 아니 왜 그렇게 대답이 확실해? 생각을 많이 해본 모양인데? 대답이 선뜻 나오니 말야. 옷을 벗을 자신이 없어. 제왕절개 때 생긴 배의 흉터랑 이 굵어진 팔뚝이랑 어떻게 보여줘. 게다가 나 함몰유두잖아. 그건 또 어떻게 보여주니. 진심이었다. 뭐? 함몰유두? ……모두들 와르르 웃었다. 배의 흉터는 없앨 수도 있어. 요즘 기술이 얼마나 좋은데. 다이어트 성공하고 함몰유두 해결되면 할 수 있다는 뜻? 그래도 나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모두들 에에― 하고 놀렸지만 진심이었다. 나는 늘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60년대보다는 70년대가 나았고 80년대보다는 90년대가 나았고, 그리고 지금이 낫다고. 개인적으로도 이십대보다는 삼십대가 좋았고 삼십대보다는 사십대가 된 지금이 나쁘지 않다. 이유는 단 하나다. 연애감정에서 멀어졌다는 것. 그토록 막연하고 불안하고 죽을 것 같은 고통스런 감정들이 모두 다 연애감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으련만 마음이 연애감정에서 멀어지자 자유로워졌다. 쓸쓸한 자유. 그 자유가 나쁘지 않다. 연애감정에서 멀어지고 나는 전공과는 상관없이 북 디자이너가 되었다. 일상에 집중했고, 어머니 생일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변 남자들의 진실과 위선을 과장 없이 바라볼 수 있었으며, 나보다 젊은 여자들이 부러움 없이 아름답게 보였으며, 사람들하고 제법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고, 여행지에서 전화통을 붙잡고 있는 대신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며 옛날 일을 떠올려도 웃을 수 있었다. 내게는 영원히 찾아올 것 같지 않았던 평화가 거기 있었다. 다시 한 사람을 향한 격정 속에 빠져서 매 순간을 휘둘리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을 욕심내는 일은 격정만 주는 게 아니라 절망을 함께 준다. 그래서 가차없이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혀버리기도 한다. 그 격정과 절망 속에 다시 나를 밀어넣고 싶지 않았다.

  (……)

  어렸을 때 인간의 나이는 서른까지라고 써놓았던 책을 읽은 기억이 난다. 조물주가 사람과 짐승들에게 생명을 줄 때 인간에겐 삼십 년을, 다른 동물들에게는 십 년 혹은 이십 년씩을 정해주는데 짐승들은 한결같이 생명이 너무 길다고 슬퍼했다고 한다. 가장 오래 살 수 있는 기간을 준 인간만이 삼십 년이면 너무 짧다고 슬퍼했다. 조물주는 할 수 없이 짐승들의 생명을 덜어와 인간에게 보태주는 것으로 인간과 짐승들의 슬픔을 덜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서른 이후의 인간의 나이에는 소가 내놓은 십 년, 돼지가 내놓은 오 년, 개가 내놓은 오 년, 원숭이가 내놓은 삼 년, 그 외의 쥐, 닭을 비롯한 숱한 짐승들이 내놓은 생명이 뒤따라다니는 셈이다.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얘기가 마흔이 되면서 불현듯 생각이 났다. 내가 이제 소의 나이를 살고 있나? 아니면 돼지의 나이일까? 내가 스물넷이거나 다섯이었을 때 누군가가 서른둘이라고 하면 저 사람은 그 동안 뭐 하다가 서른둘이 됐을까? 생각했던 것처럼 이제는 서른둘쯤 된 사람도 나를 보고 저이는 뭐하다가 마흔이나 됐을까 생각하겠지, 싶으니 너무 오래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사람보다는 가금류 같은 짐승들하고 친한 편이었던 게 다행으로 여겨진다.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관계에 몰입할 일은 없겠으나 짐승들이 보태준 나이를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이며 오래 살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실연에 무슨 이유가 있겠어, 사랑이 식었겠지. 오래된 이별을 회고하는 흔한 대답입니다. 연인들의 이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하고 스스로도 답하지 못하면 고통스럽지요. 이유가 확실한 실연이 얼마나 있을까? 이유를 추궁하는 짓은 사랑의 감정에서 이타심과 이기심의 비율을 측량하려는 일만큼 부질없지요. 이 소설은 실상 서로 다른 답을 갖고, 그 답을 조금씩 의심하고 외면한 채 세월을 건너온 중년들의 이야기입니다. 찬란한 이십대에도 삶은 더없이 누추한 듯하여, 존재는 그 기미만으로도 지레 흔들리곤 하죠. 그런 이유로 사랑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지우듯 도망칠 수도 있겠어요. 이 소설을 읽으며 묵은 절망이 새삼 되살아나네요. 그녀에게도 군화처럼 무겁고 답답하고 막막한 시간들이 있었다는 거잖아요. 이리 늦된 깨달음이 있으니 중년 화자의 고즈넉한 독백이 더 쓸쓸합니다. 한 마디 덧붙이자면, 할머니에게 ‘여든부터는 남의 나이를 먹는다’는 지혜로운 말씀을 듣고는 ‘남’이 사람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짐승들도 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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