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엄마 생활을 찾으세요."
두 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을 듣는 순간, 현기증이 났다. 목구멍에 울음이 걸렸다. 글쎄 내 '생활'이 뭐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가정과 자식을 뺀 내 생활은 존재하지 않았다. 전업주부가 되어 삼십년을 살다보니 내가 곧 그들이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을 하면서 울고 웃고 살아온 것이 곧 나의 생애였다. 밖에 나간 가족들이 전해주는 하루 생활을 듣기 위해 온 종일 기다리고, 그것이면 됐지 위로받고 살았다.
이륙을 위해 비행기는 활주로를 한없이 달리고 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비행기가 가볍게 붕 뜨는가 싶더니 점차 한 단계 한 단계 높이 뜨기 시작했다. 들판이 보이고, 산봉우리가 보이고, 바다가 보이고, 온 세상이 안계眼界 아래 놓이게 되었다. 비행기는 드디어 구름 사이에 갇히고 동체는 더 이상의 동요는 없었다. 이륙, 이륙. 아, 내가 하늘로 뜨다니….
늦은 휴가를 떠나던 지난여름, 난생처음 이륙 활주를 자세히 지켜볼 수 있었다. 마침 비행기 날개 앞 창가에 앉았던 내게 아침 10시의 금빛 태양과 이륙 활주 쇼는 덤으로 받은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활주로 끝을 향해 달리던 동체는 안간힘을 쓰고는 있었지만 성급하게 이륙을 시도하진 못했다. 이륙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것은 참 긴 시간이었다.
그랬다. 생각해보면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란 항상 쉬운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사를 가는 일, 직장을 옮기는 일, 남편과의 사별, 육친과의 별리….
정인情人과의 작별도 무척이나 힘든 일이었다. 스물 네 살의 겨울, 결혼을 생각했던 오빠의 친구가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할 때 정말이지 힘들었다. 미라보 다리 아닌 광주천 다리 위에서 흘러가는 물에 몸을 던지고도 싶었다. 세상의 끝에 선 듯 그냥 콱 죽고만 싶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를 잊지 못했다.
이륙은 착륙 못지않게 참 힘든 일이라 들었다. 이륙 3분, 착륙 전 8분을 마의 11분이라고들 부른다. 이륙은 비행에서 가장 무거운 중량 상태이며 엔진도 최대 출력으로 운전된다고 한다. 젊은 날엔 내게도 훨훨 날아갈 만한 충분한 에너지가 있었을 것이다. 허나 지금의 나는 어떤가.
다시 젊은 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멋있게 한번만 날고 싶다. 구름 위를 나는 비행기처럼. 정말이지 멋지게 날아보고 싶다. 결혼이라는 것은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교사생활을 접을 때 나는 이임 인사도 변변히 치르지 못했다. 울음이 목구멍에 걸려 작별인사를 할 수가 없었다. 그냥 교무실 문을 울면서 뛰쳐나온 것이 내 이임 인사였다.
지금의 내가 두 아들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것은 혼자가 되기 싫어서일까.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안타깝다. 젊은 날처럼 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 그들의 무엇이 되고 싶다. 아마도 나라는 동체는 쉽게 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고장 난 모성을 지닌 비행기임이 분명하다. 마치 원심력에 끌리듯 이륙을 주저하며 두 아들의 주위만 맴돌고 있으니. 내 날개는 이미 퇴화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빠르게 더 빠르게 떠나야한다고 다짐해 보지만 그럴수록 더욱 아들들에게 곤두박질치고 있다.
이제 삼십 중반에 선 그들이 또다시 우리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외치기 전에 어서 빨리 자식들로부터 이륙을 해야 한다. 가볍게 떠야 한다. 조금씩 높이 뜨다가 아예 보이지 않는 구름 사이로 숨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젊은 날의 연인과 이별할 때는 그래도 젊음이 주는 '희망과 여유'라는 것이 있었을 게다. 이임 인사 대신 교무실 문을 뛰쳐나갈 때도 사실은 돌아갈 곳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가 슬픈 것은 이제 자식들로부터 이륙하면 착륙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막막하다. 다시는 착륙할 지점이 없는 이륙이란 영원한 작별 아닌가.
이륙이 아프다. 그러나 또 다른 세계를 만나는 기쁨도 있지 않을까. 영원한 자유, 착륙도 이륙도 없을 그 '자유'를 마냥 누리고도 싶다.
<수필세계>, 2012년 겨울호
[출처] 이 륙離陸 / 박경주 수필 / <수필세계> 2012년 겨울호|작성자 참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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