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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들국화/정비석

by 안규수 2013. 2. 15.


 

 

가을은 서글픈 계절이다.

시들어 가는 풀밭에 팔베개를 베고 누워서, 유리알처럼 파아랗게 개인 하늘을 고요히 우러러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까닭 없이 서글퍼지면서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어지는 것은, 가을에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한 감정이다.

섬돌 밑에서 밤을 새워 가며 안타까이 울어대는 귀뚜라미의 구슬픈 울음소리며, 불을 끄고 누웠을 때에 창호지에 고요히 흘러 넘치는 푸른 달빛이며, 산들바람이 문풍지를 울릴 때마다 우수수 나뭇잎 떨어지는 서글픈 소리며 --- 가을빛과 가을 소리치고 어느 하나 서글프고 애달프지 아니한 것이 없다.

가을은 흔히 ‘열매의 계절’이니 ‘수확의 계절’이니 하지마는, 가을은 역시 서글프고 애달픈 계절인 것이다.

깊은 밤에 귀뚜라미 소리에 놀라 잠을 깨었을 때, 그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불현듯 그리워지기도 하고, 가을볕이 포근히 내리비치는 신작로(新作路)만 바라보아도, 어디든지 정처 없는 먼 길을 떠나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도 역시 가을이라는 계절이 무한히 외롭고 서글픈 때문이리라.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

사시절(四時節)의 면목(面目)이 모두 제대로들 특색이 있지마는,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가장 깨끗하게 하는 것은 가을이 아닌가 한다.

봄은 사람의 기분을 방탕에 흐르게 하고, 여름은 사람의 활동을 게으르게 하고,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음침하게 하건마는, 가을만은 사람의 생각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바람 소소하게 부는 가을 아침이나 가을 저녁에 혼자서 소풍을 나서 보라! 친구도 필요하지 않고, 책도 소용이 없으니, 아주 알몸으로 준비도 없이 혼자서 호젓한 산 속을 거닐어 보라!

낙엽을 밟으며 단풍진 나무숲 사이를 혼자 소요(逍遙)하노라면, 그대의 생각은 반드시 가을 물같이 맑아지고, 그대의 마음은 정녕코 가을 하늘같이 그윽해질 것이다.

나는 가을을 외롭고 서글픈 계절이라 말했거니와, 마음이 외롭고 서글퍼진다는 것은, 그것이 곧 마음이 착해진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 속에서 비애가 가장 순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시절 중에서 가을을 가장 사랑하듯이, 꽃도 가을꽃을 좋아한다. 꽃치고 정답고 아름답지 아니한 꽃이 어디 있으리오 마는, 나는 꽃 중에서는 가을꽃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들국화를 더 한층 사랑한다.

가을꽃으로 대표적인 꽃은 코스모스와 들국화이리라.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백화가 난발하는 봄, 여름을 지나고 나서, 찬이슬 내리는 가을에야 피는 꽃들이기에, 가을에 피는 꽃들은 어딘가 처량한 아름다움이 있다.

가을꽃 치고 청초(淸楚)하지 않은 꽃이 어디 있는가? 코스모스가 그러하고, 들국화가 그러하다. 그러나 코스모스는 사람이 가꾸어야 피고, 따라서 대개는 뜰이나 화단 같은 데 피지마는, 들국화만은 누가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필 뿐 아니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들판이나 산 속에 핀다. 내가 코스모스보다도 들국화를 한층 사랑하는 이유도 거기 있는 것이다.

 

가을 아침 일찍이 산이나 들에 나가 보라. 그대는 아무도 없는 잡초 사이에 찬이슬을 함빡 머금고 피어 있는 들국화를 볼 수 있을지니, 그 그윽한 기품에 그대는 새삼스러이 놀라게 될 것이다.

들국화는 특별히 신기한 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인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에 외로이 피어 있는 그 기품이 그윽하고, 봄, 여름 다지나 가을에 피는 기개(氣槪)가 그윽하고, 모든 잡초와 어울려 살면서도, 자기의 개성을 끝끝내 지켜 나가는 그 지조가 또한 귀여운 것이다.

들국화는 달리아나 칸나처럼 빛깔도 야단스럽게 아름답지 아니하고, 꽃송이의 구조도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보랏빛의 부드럽고도 순결한 맛을 볼수록 마음을 이끌리게 한다.

찬란한 빛깔로 유혹하려는 것이 아니다. 말 없는 가운데 자신의 순결성(純潔性)을 솔직히 보여 주는 그 겸손이 더 한층 고결하다는 말이다.

나는 가을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꽃도 가을꽃을 사랑하고, 가을꽃 중에서도 들국화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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