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어제 저녁식사를 마치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호치민 주석의 일대기를 읽었는데요,
베트남의 현대사와 얽힌 그의 고단한 삶이었지만
독립과 자유라는 그의 중심이 베트남의 역사에 도도히 흘러가고 있음을 새삼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도 김남국목사님의 <무너지지마라>라는 책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신앙을 잘못 배웠다.
신앙은 삶이고 생활인데 우리는 신앙을 미션mission으로 한다.
그러니까 삶과 생활이 없다.
예를 들면 매년 연말이 되고 연초가 되면 우리는 신앙계획을 세운다.
새해에는 내가 특새에 빠지지 않겠다, 매일 새벽기도를 나가겠다, 성경을 1독 하겠다, 제자훈련을 받겠다, 수련회에 참석하겠다 등등.
그것을 한 해 동안 지켜서 연말이 되면 체크한다.
성경 통독했다고 상을 주면 상도 받는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목표를 세우고 연말에 점검해서 목표한 것을 해냈으면 자신이 올해 하나님 앞에 잘 살았다고 생각한다.
단기선교가 미션이다. 단기선교 갔다 오면 선교한 줄 안다.
봉사가 미션이고 헌금이 미션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 신앙을 미션으로 한다. 그러나 신앙은 삶이지 미션이 아니다.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불법을 행한 자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와서 상 받을 줄 착각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고 하신다.
무엇을 “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이 내 삶에서 무엇을 만들어냈는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갔는가가 중요하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 자랐는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되었는지가 중요하다.
끔찍한 자기의를 버리고
주 닮게 하소서.

신앙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인데 자신이 뭔가 정해놓고 그것을 미션으로 이루니까, 하나님은 닮지 않고 ‘의’만 늘어간다.
하나님 앞에 신앙생활 하는 것 같아도 결국 자기의만 높아진다. 미션이기 때문에 그렇다.
수련회에서 미션을 완수한 아이들에게 “참 잘했어요” 스티커를 붙여주듯이 자신에게 ‘내가 그래도 하나님 앞에서 이거 했어’ 하다보면
점차 하나님을 배우는 것과 실제적인 삶은 없어지고 자기의만 늘어난다.
교회 화장실 휴지통에 플라스틱 커피잔이 버려진 것을 종종 본다.
화장실 휴지통은 휴지를 버리는 곳이고 플라스틱은 분리 배출해야 되는 것임을 상식으로 알고 있을 텐데
어디서 이런 신앙을 배웠을까? 그러고도 하나님께 손들고 예배드릴 수 있는가?
예배하러 왔다면서 스태프들의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러 온 예배자에게 중요한 것이 “나 예배하러 와서 자리에 앉았다”인가, “나 예배했다”인가?
그 예배에서, 그 예배에 온 예배자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난 자의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신앙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다.
영어를 왜 배우는가? 돈 내고 영어 배우면서 “난 절대 영어하는 사람 안 만날 거야” 하는 사람은 없다.
영어를 배울 때는 한국에 머물러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배우는 것 아닌가?
행하지 않으면 내가 믿는 그 유익됨을 알 길이 없다.
기독교 신앙은 아주 실제적인데 다들 그 신앙을 너무 추상적으로 알아서 신앙이 뭔지 모른다.
내가 한 신앙생활이 나의 삶을 키워야 한다.
가정에서든 어디서든 징징대지 말고 내가 간 곳에 즐거움이 있게 하라.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질서를 지키고, 같이 웃고 양보하고, 내가 있음으로 기쁨이 있는 삶으로 ‘다름’을 드러내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예수를 믿는 것은 나도 유익이 되고 그 행함으로 남도 유익이 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렇게 힘을 잃은 것은 신앙을 미션으로 하는 성도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신앙이고 의인 줄 안다.
목회자를 포함해서 한국 교회 교인들이 이 문제에서 다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 의로운 사람, 말 잘하는 사람, 미션을 수행하는 사람은 너무 많은데 열매 맺는 삶은 많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실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너지지 마라. 김남국 / 규장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 야고보서 2장 14,18절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 에베소서 4장 13절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 베드로후서 1장 8절
주님, 신앙생활과 제 행동의 동기들을 살펴봅니다.
주님 주시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제 의를 추구했던 일들을 회개하게 하소서.
순수한 믿음의 행동으로 제 마음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길 소원합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롬 15: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집단 이기주의의 본질을 파헤친 나인홀드 니부어는 ‘책임적인 자아’라는 책에서 ‘사람들의 3가지 윤리의식’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첫째는 윤리를 목적에 따라 해석하는 목적 지향적 윤리를 가진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편법과 불법도 마다 않는 이기주의적인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단지 수단일 뿐입니다.
●둘째는 의무에 따라 윤리를 지키는 규칙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법도 잘 지키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지성인입니다.
그러나 남을 돕는 법이 있으면 남을 돕고 남을 돕는 법이 없으면 남을 돕지 않는 수동적인 윤리이며
또한 위선자일 수도 있습니다.
●셋째는 윤리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 책임감을 가진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기 때문에 사회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실천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니부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첫 번째 존재로 살아가며 성경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세 번째 존재의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삶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으면 주님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마땅히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는 삶을 사십시오.
반드시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채워주십니다.
주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모르는 사람도 돕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위 3가지 중에 어느 것이 자아상인지 분별하고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 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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