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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편지

유브라데 강을 넘어

by 안규수 2019. 1. 14.

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주말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자본주의 시대의 

최고의 선은 '이익(자기유익)의 극대화' 이죠.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은 있어서는 안될 큰 일이고

일부러 손해를 보는 것은 '바보'가 되는 일이지요. 

 

예수님 걸으셨던 길, 그 분이 사셨던 삶을 묵상해 봅니다.

이제 나는 세상이 말하는 '바보'로 살아가는 삶을 바라 봅니다. 

좁은 길을 바라 봅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멋진 하루 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고후 1: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아버지가 돈 때문에 노동자들에게 죽는 모습을 본 10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청년이 되어 돈 때문에 고통 받지 않는 이상향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운동에 빠져 혁명에 가담을 했다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사형수들을 수감하는 감옥으로 기차를 타고 가는 도중 일반 승객들도 함께 사용하는 역에 잠시 섰는데 
갑자기 한 여자가 열차에 타서 죄수들에게 작은 책을 몰래 나눠주고 서둘러 내렸습니다.
대부분은 그 책을 바로 버렸으나 그 청년은 몰래 숨겨 감옥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신약’이라고 쓰여진 그 책을 청년은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리고 잘은 모르지만 그 책에 나오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사형이 취소되어 자유의 몸이 된 이 청년은 감옥에서 읽은 그 책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생각을 소설로 쓰기 시작했는데 이 책들은 놀라운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톨스토이와 함께 러시아의 대문호로 인정받는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이 청년은 성경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리가 아니라고 누군가 분명하게 증명한다 하더라도 나는 진리보다 
그리스도 주 예수와 함께하는 삶을 선택할 것입니다.”
말씀 안에 계시는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를 만나주시고, 또한 위로해주십니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성경을 믿고, 그 가운데 위로하시고 또 만나주시는 주님을 체험하십시오. 아멘!!
 
주님, 절대로 내 손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 더욱 주님을 찾읍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잠언 14장>
 
1지혜로운 여자는 집을 세우지만, 어리석은 여자는 제 손으로 집을 무너뜨린다.
2바른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외하지만, 그릇된 길을 걷는 사람은 주님을 경멸한다.
3미련한 사람의 말은 교만하여 매를 자청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그를 지켜 준다.
4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지만, 소가 힘을 쓰면 소출이 많아진다.
5진실한 증인은 거짓말을 아니하여도, 거짓 증인은 거짓말을 뱉는다.
6거만한 사람은 지혜를 구해도 얻지 못하지만, 명철한 사람은 쉽게 지식을 얻는다.
7미련한 사람의 앞을 떠나라. 네가 그의 말에서 지식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8슬기로운 사람의 지혜는 자기가 가는 길을 깨닫게 하지만, 미련한 사람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인다.
9어리석은 사람은 속죄제사를 우습게 여기지만, 정직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총을 누린다.
10마음의 고통은 자기만 알고, 마음의 기쁨도 남이 나누어 가지지 못한다.
11악한 사람의 집은 망하고, 정직한 사람의 장막은 흥한다.
12사람의 눈에는 바른길 같이 보이나,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 있다.
13웃어도 마음이 아플 때가 있고, 즐거워도 끝에 가서 슬플 때가 있다.
14마음이 비뚤어진 사람은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고, 선한 사람도 자기가 한 만큼 보응을 받는다.
15어수룩한 사람은 모든 말을 다 믿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행동을 삼간다.
16지혜 있는 사람은 두려워할 줄 알아서 악을 피하지만, 미련한 사람은 자신만만 해서 조심할 줄을 모른다.
17성을 잘 내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하고, 음모를 꾸미는 사람은 미움을 받는다.
18어수룩한 사람은 어수룩함을 유산으로 삼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을 면류관으로 삼는다.
19악인은 선한 사람 앞에 엎드리고, 불의한 사람은 의인의 문 앞에 엎드린다.
20가난한 사람은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지만, 부자에게는 많은 친구가 따른다.
21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22악을 꾀하는 사람은 길을 잘못 가는 것이나, 선을 계획하는 사람은 인자와 진리를 얻는다.
23모든 수고에는 이득이 있는 법이지만, 말이 많으면 가난해질 뿐이다.
24지혜는 지혜 있는 사람의 면류관이지만 어리석음은 미련한 사람의 화환이다.
25증인이 진실을 말하면 남의 생명을 건지지만, 증인이 위증을 하면 배신자가 된다.
26주님을 경외하면 강한 믿음이 생기고, 그 자식들에게도 피난처가 생긴다.
27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니,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한다.
28백성이 많은 것은 왕의 영광이지만, 백성이 적은 것은 통치자의 몰락이다.
29좀처럼 성을 내지 않는 사람은 매우 명철한 사람이지만, 성미가 급한 사람은 어리석음만을 드러낸다.
30마음이 평안하면 몸에 생기가 도나, 질투를 하면 뼈까지 썩는다.
31가난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이지만, 
궁핍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이다.
32악한 사람은 자기의 악행 때문에 넘어지지만, 의로운 사람은 죽음이 닥쳐도 피할 길이 있다.
33지혜는 명철한 사람의 마음에 머물고, 미련한 사람 마음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34정의는 나라를 높이지만, 죄는 민족을 욕되게 한다.
35슬기로운 신하는 왕의 총애를 받지만,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신하는 왕의 분노를 산다.

 

 

<손해 보고 양보하는 마음을 가질 때~> 

                      - 유브라데 강을 넘어. 윤성철 목사님 - 

 

아브람은 자신의 집에서 사람을 기르고 훈련하는 데만 집중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던 그 지역의 이방 족속인 마므레와 에스골 그리고 아넬의 형제들과 동맹을 맺었다.
 
창세기 21장에도 처음에 아브라함을 시기하여 쫓아냈던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도 결국 아브라함에게 나아와 동맹 맺기를 청한다. 
믿는 자들만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동맹을 요청받고 함께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성경은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할까? 
진지하게 질문해야 할 부분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며 그 사이에서 영향력을 주고받는 데 머물러 있을 때가 많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 삶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나타냄으로써 그들이 비록 이방인이지만 
나와 동맹을 맺고 싶어 하도록 하는 선한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창 14:13
 
여기서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의 어원은 “강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유브라데 강을 건너서 들어온 이방 사람이라는 의미다. 
이 이름 자체가 주는 가나안 사람들의 텃세가 느껴지는가? 
오죽하면 아내를 누이라고 말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여길 만큼 두려웠겠는가? 
오죽하면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빼앗기고 떠날 수밖에 없었겠는가? 
이삭의 때에 이르러서까지 이런 텃세에 시달렸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그곳에 터를 잡고 있던 여러 사람들과 동맹을 맺었다는 것은 
그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과 동맹을 맺을 사람은 없다. 
동맹을 맺는다는 것은 그냥 잘 지내자는 것이 아니다. 
공동의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서로 목숨을 걸고 함께 싸울 만큼 깊은 차원의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을 만큼 아브라함이 그들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 존재인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의 자리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유익이 되고 있는가? 
간단히 말해보자. 
하나님이 각자에게 허락하신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통해서 유익을 얻고 있는가? 
그 유익의 결과로 나를 찾고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지 돌아보기 바란다.
 
여러분은 마므레와 에스골이 성품이 좋아서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비멜렉과 그의 군대장관 비골이 대장부라서, 
사람이 호탕해서, 쩨쩨하지 않아서 아브라함을 용납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두 가지를 보았다.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과 
아브라함과 함께하는 데서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고 함부로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것이다. 
우리도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어야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에게는 그만큼 손해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모두에게 윈윈(win-win)이 되었을지 몰라도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을 깊이 연구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들의 신뢰를 얻기까지 아브라함이 많은 희생을 감당하고 손해를 봤을 것이 분명하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으로 손해 보겠다는 자세와 태도, 그런 마음 자체가 부족하다. 
그러면서 믿음 생활은 잘해보려고 뜨겁게 사모하고 배우고 훈련한다. 
그러나 그 길을 가노라고 하면서 주차 문제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한다. 
은혜 받겠다고 먼저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 
이래저래 손해는 안 보려고 하면서도 사모하고 갈급해 한다. 
이 엄청난 극과 극의 모습을 편하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이삭이 미련해서 우물을 내주고 다시 파고를 반복했겠는가? 
그 당시 우물 하나를 파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이 들어갔는지 아는가? 
이때 우물은 우리가 보통 이해하는 옹달샘 수준이 아니다. 
잠깐 물만 얻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 암반 지층까지 파내려가서 거대한 물 저장소를 만드는 것이다. 
그토록 수고하여 확보한 것을 내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생명이 달린 문제이기도 하다. 
물론 그들의 텃세 앞에 힘이 부족하여 빼앗긴 것도 있겠지만 결국 수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내준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이 사람은 함께해도 절대 자신들에게 손해가 되지 않을 존재이며, 
오히려 자신들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어 동맹을 맺으면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라면 괜찮다. 나도 손해 볼 용의가 있다. 함께하자.”
 
이것이 동맹의 결과다. 그리고 그 과정 가운데 그들은 보게 된다. 
아브라함의 삶에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들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 창 21:22
 
이삭에게도 동일한 고백을 하며 찾아온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 창 26:28
 
318명이 아브라함의 ‘실력’을 의미한다면 아브라함과 동맹을 맺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그들을 섬긴 아브라함의 ‘성품’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들조차 부인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한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그러나 기억하라. 
그들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다가올 수 있게 했던 것은 
손해 보며 유익을 주었던 두 사람의 마음과 태도였다.
 
이기적인 내 사랑 아닌,
주님의 마음.
주님의 사랑을 구하세요!
 
이 시대에 우리에게 실력 있는 성도들이 부족한가? 아니다.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실력과 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도처에 있다. 
그런데도 왜 이들의 영향력이 세상에서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영역 안에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있는가?
 
그 통로가 되는 태도와 성품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도록 손해 보고 양보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너무 부족하다.
 
얼마 전 사랑하는 집사님 내외분과 커피를 마시며 교제하고 있는데, 집사님에게 이상한 전화가 걸려왔다. 
알고 보니 취기가 있는 사람이 후진하다가 집사님의 차를 받아놓고 
왜 차를 이렇게 주차해놨느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 것이다. 
나는 너무 황당하고 기가 막혀서 멍해 있는데, 그 집사님은 죄송하다고 하며 차를 빼주시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어안이 벙벙해 있는 동안 집사님은 거듭 고개를 숙이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셨다. 
어떻게든 해보려고 한 내가 무안할 만큼, 너무 무례하고 황당한 그 사람에게 집사님은 그렇게 반응한 것이다. 
결국 그 사람은 화를 내며 그냥 가버렸다. 
목사인 나는 기막혀 하는데 집사님은 그냥 보내드린 것이다.
 
물론 불합리한 것은 바로잡아야 하지 않느냐고 주장하시는 분이 있는 줄 안다.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것을 건드려봐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바로잡겠다고 하는 자신의 마음 안에 기꺼이 손해 보고 양보하고 이해하려는 마음이 있는가? 
우리는 이 주님의 긍휼의 태도와 마음을 가진 상태에서 바로잡겠다고 해야 한다. 
우리에게 이 중심이 없으면서 불합리한 상황만 바로잡겠다고 외친다면 결과는 늘 우격다짐이나 싸움으로 끝난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 사이에서 나의 유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가? 
만약 후자라면 그들이 당신과 동맹을 맺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에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도 묘연해지고 만다.
 
유브라데 강을 넘어. 윤성철 / 규장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 창세기 39장 2,3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 미가 6장 8절
 
하나님,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이유. 바로 제 마음과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전혀 손해 보려 하지 않고 나의 유익만을 구했습니다. 
은혜 받으려 하는 일에도 제 자신만 챙겼습니다. 이런 저의 모습을 회개합니다. 
기꺼이 손해 보고 양보하면서 저의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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