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아침, 행복한 아침입니다. ^0^
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법이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닮고 싶은~ 간절한 아침입니다. ^0^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오늘 아침은 한재욱 목사님의 <인문학을 하나님께 2>의 일부를 함께 나누며 하루를 힘차게 열어가길 소망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힘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자를 지배해온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힘이 있어야 평화도 유지되고, 자유도 있고, 낭만도 있다.
특히 국가 간의 문제는 철저한 힘의 논리이다.
국가가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어야 생존도, 발전도 있다.
힘은 이렇듯 아주 중요하지만 힘처럼 위험한 것도 없다.
넬슨 만델라는 “우리의 문제는 힘이 너무 많은 데 있다”라고 했다.
힘이 많아지면 스스로 무한한 인간인 것처럼 착각한다.
힘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게 만든다.
힘을 가지면 더 큰 힘을 요구하며 아무도 대항할 수 없는 절대 힘을 추구한다.
죄를 짓는 것도 힘이 많을 경우에 그렇다.
힘이 있으면 누가 유혹하지 않아도 스스로 유혹의 자리로 들어간다.
그런 사람에게서 하나님은 종종 힘을 빼놓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스티브 도나휴의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을 보면 우리 인생은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사막을 건널 때 “오아시스를 만나면 쉬어가라”라고 권면한다.
또한 “모래 웅덩이에 갇히면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라”라고 한다.
한마디로 힘을 빼라는 것이다.
힘을 빼야 인생의 욕망 구덩이에 더욱 박히지 않는다.
하나님은 혈기왕성한 모세를 40세에 쓰지 않고 80세가 넘어서 쓰셨다.
힘을 빼고 쓰신 것이다. 바울 사도도 그러하다.
바울 사도는 육체의 가시로 인해 힘이 빠졌을 때,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체험했다.
또한 바울 스스로가 힘을 빼고 유연해질 때 더욱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게 되었다.
참 사랑은 힘을 뺀다. 권력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이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그 권력을 놓아 버린다.
모두들 권력의 힘을 알고 있기에 권력을 잡으려고 혈안이다.
그런데 사랑에서는 그 권력을 놓는다. 사랑하는 쪽이 안달한다.
사랑하면 권력을 빼고 자존심도 빼고 힘도 뺀다.
엄마와 딸이 싸우면 대개 엄마가 진다.
딸이 엄마를 사랑하는 것보다 엄마가 딸을 사랑하는 것이 더 크기 때문이다.
진짜 사랑하면 힘을 휘두르지 않고, 힘을 뺀다.
사랑의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은 덜 사랑하기에 그러하다.
참 사랑을 하면 갑질을 벗고 갑옷도 벗는다.
사랑하지 않으면 힘을 준다. 그러나 참 사랑을 하면 힘을 뺀다.
마치 을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랑하기에 낮아지고, 사랑하기에 힘을 휘두르지 않고 약해진다.
이것이 예수님이 연약해보이시는 이유이다.
바리새인들은 힘을 주는 존재들이었다.
날카로운 칼이었다.
그러나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초라한 마구간에서 연약한 아기로 태어나 이 땅에 오셨다.
우리를 참 사랑하시기에 마치 을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힘을 빼신 채 낮고 헐한 영혼들을 만나고 안아주셨다.
예수님은 힘을 빼고 징계를 받으며 채찍에 맞으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랑 때문에 힘을 빼신 최고의 사건이다.
그분이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으심으로,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사 53:5).
신앙은 자신의 모든 힘을 빼고 자신의 등을 하나님의 등에 기대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전 생애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인생의 키를 붙들고 있는 손의 힘을 빼고, 주께 키를 맡기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힘을 빼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께,
내 힘을 빼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인문학을 하나님께 2. 한재욱 / 규장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 고린도전서 9장 21 ,22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 요한일서 4장 10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 요한일서 4장 16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며 저도 힘을 빼겠습니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힘을 주는 존재가 아닌 사랑함으로 낮아지겠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사랑처럼 말입니다.
나의 힘을 빼고 하나님의 등에 기대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자 되게 하소서.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엡 4: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1912년에 첫 출항에서 침몰한 ‘타이타닉 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여객선입니다.
당시 거대한 배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타이타닉 호는 16개의 격벽으로 나누어 설계됐는데
이론상 이중 4구획에 물이 차도 배가 가라앉지 않는 사실상 침몰할 수 없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빙산에 배가 기울어지며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일이 일어나 배가 가라앉게 된 것이었습니다.
한 가지 더 안타까운 사실은 사고 당시 20km미터 떨어진 곳에 대형 화물선 캘리포니안 호가 있었습니다.
이 배에서 무전만 제대로 받았다면 대부분의 승객은 구조될 수 있었지만
캘리포니안 호는 규정을 어기고 한 명의 통신사에게 24시간 업무를 보게 했습니다.
며칠을 밤을 새다가 지쳐서 잠이 든 통신사는 구조요청을 듣지 못했고
결국 90km나 떨어진 카르파티아 호가 구조를 하러 왔으나 여객선인데다가 동력도 거의 떨어진 상태라
승객들을 30%정도 밖에 구조하지 못했습니다.
사상 최악의 침몰사고가 난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던 일 때문이었고,
승객들이 구조되지 못한 것도 푼돈을 아끼려고 사람 한 명을 덜 썼기 때문입니다.
작은 방심과 작은 틈이 나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일상의 작은 죄를 조심하십시오. 아멘!!
주님, 어떤 공격에도 흔들림 없는 견고한 요새로 믿음을 세워주소서.
습관적으로 짓는 사소한 죄들이 있는지 살펴보고 끊어냅시다.
방식에 따른 조기 교육과 물질만능주의를 경계합시다. <김장환, 나침반출판사 www.nabook.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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