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왜 오르느냐는 물음에 ‘산이 거기 있으니까’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겸손의 미덕이 몸에 밴 우리 옛 선비들은 ‘산에 오른다’는 말보다 ‘산에 든다’라고 했다. 며칠 전 북미 메티리지 산 등반 도중 열 손가락을 잃은 불굴의 산악인 김홍빈 대장이 신의 영역인 히말라야 8,000m 고봉 브로드피드를 오른 후 하산하다 그만 실종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그토록 평생 몸을 바쳐 산을 사랑한 이유는 무엇일까?
산에는 산의 언어가 있다. 산은 몸짓으로 말한다. 잔잔한 샘물은 맑은소리로 말하고, 흰 폭포는 힘찬 운동으로 말하고, 푸른 초목은 빛깔로 말한다. 나무 사이를 스쳐 가는 바람은 소리로 말하고, 아름다운 꽃은 향기로 말한다. 산의 언어는 바로 침묵이다. 침묵의 언어가 더 많은 것을 가르친다.
자연은 하나님이 만든 위대한 책이다. 산은 영원하다. 협곡을 흐르는 개울의 중얼거림은 산의 맥박이고, 바람이 불면 나무가 서로 비비고 속삭이며 내는 소리는 산의 숨결이다. 언제나 그 언어와 호흡은 쉬지 않는다. 산은 억겁의 세월을 살았으되, 항상 젊고 바쁘다. 인간은 자연의 품을 떠날 수 없고, 또 떠나서 살 수도 없다. 자연은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의 영원한 본향이라는 것도. 생명의 본향에 대한 끊임 없는 향수, 그것이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보이지 않은 의미인지도 모른다.
지난 새천년 봄, 산악회를 따라 백두대간 등정을 한 달에 두 번, 토요일에 무박 2일 일정으로 시작했다. 설악산 향로봉에서 시작해서 대간의 마지막 코스인 지리산 천왕봉까지 무려 2년 동안 비나 눈이 내려도 쉬는 날 없이 강행한 고난의 행군이었다.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했으나 끝까지 완주한 사람은 8명뿐이었다.
처음 대간 산행 때는 정상에 꽂을 깃발도 없이 뺏고 빼앗기는 무슨 고지전이라도 치르듯 산을 무작정 올랐었다. 대간 산행이 거의 끝나 갈 무렵이었다. 산기슭이나 길섶에 낮게 엎드려 있는 작은 풀꽃이 눈에 띄었다. 그 풀꽃이 먼지 낀 나의 눈꺼풀을 벗겨 주었다. 풀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었다.
푸른 오월, 한반도 중원인 경북 문경시의 은티마을에 새벽 3시에 도착하여 4시 희양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험준한 계곡을 지나, 성벽에 닿으니 먼동이 터오고 있었다. 청명한 날씨에 운해가 높은 산봉우리만 얼굴을 드러낸 채 운하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울창한 숲은 그들만의 은밀한 대화를 속삭이고 있었다. 세속에 물든 이방인이 괜히 끼어들어 그들만의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주봉 희양산 정상에 올랐다. 거대한 바위에 앉았다. 안개가 마치 만조일 때 바닷물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그 운해로 덤벙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때 망망대해와도 같은 운해를 헤치고 떠오르는 아침 해는 그 어느 일출보다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때 불청객에 놀란 듯 새 떼들이 하늘 높이 날아올라 산밑으로 사라졌다.
그날 희양산, 구왕봉, 주치봉, 악휘봉, 장성봉 등 다섯 주봉을 열 시간 동안 오르내리면서 땀을 비 오듯 쏟았다. 마지막 장성봉 정상에서 배낭을 벗고 잠시 바위에 앉았다. 고요함 속에 풀벌레 우는 소리, 새들의 지저귀는 노랫소리에 피곤한 몸이 해저 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저 멀리 희양산 주봉 흰 바위가 물끄러미 굽어보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끼끗한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마치 책상 앞에 굳건히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잘생긴 남자의 준수한 이마 같다. 생애를 살아오면서 용서할 수 없는 응어리도, 욕망도, 버릴 수 없었던 아집도, 저 장엄한 산 앞에서는 한낱 부질없는 허상이라는 탈속의 무아 지경에 목이 멘다.
산에는 진정한 우정이 있다. 산에 가면 미움이 없어진다. 모두 다 소박하고 단순하고 진실한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산은 위대하다. 산속에서는 미움이 없어지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 진실한 인간적 대화가 꽃핀다. 대간을 끝까지 함께 한 친구들은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끈끈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종주 대간을 마치고 나서 산행은 늘 나 홀로였다. 송광사와 선암사를 품고 있는 조계산이 주 무대였다. 나 홀로 걷는 길은 외롭지 않았다. 길가에 핀 야생화가 반겨주고 갈참나무들이 가지를 흔들리면서 말을 걸어온다. 어서 오라고, 반갑다고. 새들이 찾아와 지저귀며 인사하고, 바람은 수고했다고 땀을 식혀 주고는 어디론가 사라진다. 장군봉 바위에 앉으면 설핏한 햇살에 중중첩첩 이 이어 달려가는 산세들, 멀리 남해 은빛 바다가 보석처럼 반짝인다.
치유의 숲이 유행이다. 불치병이 든 사람이나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 산속에서 거짓말처럼 좋아졌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대간 산행 이전만 해도 체중이 빠지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2년여, 대간 산행 끝에 80킬로를 넘나들던 체중이 70킬로로 줄었다. 무려 10킬로를 감량하는 데 성공했다. 대간 산행에서 흘린 땀방울의 대가는 공짜가 아니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한다는 뜻이리라. 산은 결코 도전이 대상이 아니다. 자신에 대한 도전이다. 산에 오르는 것은 육체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면서 정신적 강인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높은 산을 오르는 일은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인생에 비유되기도 한다. 나는 이 과정에서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데서 오는 충만함을 느끼기도 하고, 극한 환경에서 마주치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통해 깨달음과 성찰을 얻기도 한다. 등산은 육체적 행위이지만 내면적으로 사색적인 측면도 강한 이유가 여기 있다.
김홍빈 대장은 이번 산행을 떠나면서 아내에게 "내가 잘 못 돼도 찾지 마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히말라야 품속에 영면했다. 그의 육신은 태고의 설산 빙하에 묻혀 있지만, 그의 불굴의 정신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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