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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그기 어떻게 생긴 긴데

by 안규수 2021. 10. 11.

 

   4월 초 남해, 가천 다랑이 논배미에는 유채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바다는 쪽빛, 산비탈은 온통 노랑 물결이 출렁인다. 바람 따라 구름이 머물다 지나간다. 아내와 함께 찾은 다랑이 마을. 푸르고 시원한 바다가 보고 싶고, 다닥다닥 붙은 다랑이 논둑을 걷고 싶으면 가천을 찾는다.

  앞엔 망망대해, 돌아서면 설흘산, 응봉산의 늘 푸른 품.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온갖 생명이 약동한다. 그런 자연환경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친 농민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이 산마을은 언제 생겼을까? 마을의 내력과 다랑이 논배미에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듣고 싶어 마을을 기웃거렸다. 내가 자란 마을도 이보다는 덜 하지만 다랑이 논배미가 있다. 어릴 적 천수답인 다랑이 논배미에서 억척스럽게 농사짓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흠뻑 비가 내리면 물줄기가 좋지 않은 천둥지기 논은 이때를 맞춰 서둘러 모내기를 일찍이 끝내야만 했다. 온 가족이 동원되어 못줄을 띄우고 눈금에 벗어나지 않게 한 포기씩 꼭꼭 모를 심고 가꾸고 거둔 자리가 오두막집 밥솥 아궁이처럼 아늑했다.

  때마침 마을 가게에서 막걸리를 들고 계시는 할아버지 두 분을 만났다. 그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궁금한 내 생각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기 어떻게 생긴 긴데.” 상기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논을 한 뺨 넓히면 우리 식구 한 끼 먹을 밥이 나오고, 열길 넓히면 아이들 학비가 나온다는 생각에 해지도록 떠날 수 없었지. 그렇게 3년 하다 보니 높이가 10(3m)나 됐고, 길이는 500자 되는 다랑이 논배미가 나왔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마치고 한숨을 쉬시면서 뜸을 들였다.

  “아이들까지 모두 일곱 식구가 이 다랑이에 의지해 살았지. 해안은 갯바위뿐이고, 깊이도 수십 길이어서 배 한 척 부릴 수 없었어. 바다에서 얻을 것이라곤 떠밀려온 미역 줄기나 다시마가 고작이었지. 전복이나 소라도 있었지만, 그때야 그게 어디 밥만 같았는가. 그저 비탈에 흙만 밟히면 고구마 심고 평지다 싶으면 보리 심어 허기를 채우는 게 일이었지. 아이들 학교 보내자니 돈이 되는 건 쌀뿐이었으니 다랑이 논배미를 치지 않을 수 없었어.”

  자연 여건이 수직 낭떠러지여서 자원이 풍부한 바다를 끼고 있으면서도 어업에 종사할 수 없었다. 오직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고생의 흔적은 온몸에 새겨져 있다. 흙을 파고, 돌부리를 뽑고, 지게질하느라 성한 손톱이 없다. 허리는 기역 자로 굽었다. 어깨와 등에 주먹만 한 혹도 생겼다. 그렇게 높고 긴 석축을 쌓았지만, 급경사 탓에 경작지는 300평 평 정도라고 했다.

  “논배미를 끝내고 돌아가려다 보면 귀퉁이에 땅이 조금 남아 있는 거야. 저거면 우리 식구 한 끼 밥인데, 퍼질러 앉아 땅을 고르고 돌을 쌓아 만든 게야. 벼 열댓 포기나 심을 수 있을까? 삿갓을 올려놓으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논배미이지.”

  집에서 굶고 있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흙을 퍼담는다고 논이 되는 건 아니다. 그때는 비료가 귀해 거름을 손수 만들어야 했다. 이런 다랑논이 7만 평이나 됐으니 마을 똥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태반은 이웃 마을에서 퍼 날랐다. 그걸 산꼭대기까지 져 날라야 했으니, 거름 만들 때면 남정네들은 똥투성이가 되었다. 마을을 소개하는 간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절벽에 붙은 제비집처럼 산비탈에 붙어 있는 아슬아슬한 마을 풍경, 비록 그 옛날 민초들의 고단한 삶도 읽을 수 있으나 그보다는 울창한 뒷산과 쪽빛 바다와 잘 어우러진 하나의 예술작품을 보는 듯하다.”

  갈 때마다 느낀 소회는 아름답다라는 이런 수사가 오히려 낯설다.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표현이지만 마을 풍경을 예술작품이라니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속에 담긴 농민들의 땀과 고통을 누가 감당하랴.

  정상에 수탉의 볏 같은 바위를 이고 가파르게 서 있는 두 산은 기골이 장대하다. 그러나 해안에서 바로 솟구친 까닭에 집 한 칸 지을 땅조차 내주지 않았다. 경사는 평균 45, 심한 곳은 60도나 된다. 45도 경사에서 석축을 1m 쌓아야 논의 폭은 1m 정도다. 60도 경사에선 2m를 쌓아야 폭이 1m. 그러니 석축은 자꾸 높아졌다. 다랭이 석축의 평균 높이는 3m. 심지어 아파트 3층 높이까지도 있다고 한다. 그런 석축 안쪽에 흙을 퍼담아야 했으니 흙은 노다지처럼 귀했다.

  이 마을은 400여 년 전 설흘산 너머 무지개마을 사람들이 오가면서 형성됐다고 한다. 농한기에 미역과 다시마를 채취하러 왔다가 민물이 흔한 걸 보고 뿌리를 내렸다고 한다. 정착에 꼭 필요한 벼. 주곡도 되고, 돈도 되고, 지붕 이고, 소먹이고, 생활용품 사는 데도 필요했다. 그래서 치기 시작한 다랑이가 300여 년의 노력 끝에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여행객이 아름답다고 하기에는 너무도 아프고 슬픈 역사가 이 작은 논배미에 담겨 있다. 다랑이 치는 일만큼이나 고달픈 게 다랑이 농사다. 표고차 300m의 다랑이 농사를 짓기 위해 지게를 지고 오르내리자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허리 굽은 할아버지를 보는 순간 아버지가 생각나 마음이 울컥했다. 아버지도 밭에서 큰 돌을 옮기다가 돌 밑에 깔려 손과 다리에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

  이곳이 명승지로 지정되고 문화재청장이 방문했다. 청장은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앞으로 다랑이는 경운기 등 농기구를 사용하지 말고 소로 논을 갈고 지게로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옛 모습 보존유지를 강조했다. 그러자 마을 어른 한 분이 이 말을 받아 청장님, 지게에 나락을 지고 올라와 보소.” 하고 말하니 청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고 한다.

  이제 전체 61가구 가운데 5가구만 논농사를 짓는다. 논 가운데 논물을 채우는 것은 10여 두락뿐이다. 묵은 다랑이는 쉽게 허물어진다. 두더지가 구멍을 파면 그리로 물과 함께 흙이 쓸려나가고, 되풀이되다 보면 다랑이는 꺼지고, 석축도 무너진다. 바다와 잇닿은 다랑이는 파도에 씻겨나가 흔적만 남았고, 도로 위쪽 다랑이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풀밭이나 돌무덤이 되어간다.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면서 말을 이어 간다.

  “이 꼴이 되어가며 만든 산말 다랑이지만, 10년 전부터는 버려뒀어. 물 대기도 힘들지만, 물을 채운다 해도 오가기도 힘들어. 지금은 풀밭이 되어 버렸네. 그 꼴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려.”

  가천마을도 우리네 농촌과 별다를 게 없다. 젊은이는 모두 도회지로 나가고 늙고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만 계신다. 막걸리 기운이 거나하신 할아버지들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누가 서럽게 살아온 이분들을 기억해 줄까? 고단한 삶의 역사가 가장 선명한 가천 다랑이는 아름답다는 찬탄에 앞서 비감할 뿐이다. 석양의 바다에는 수많은 은유를 간직하고도 하나의 색채로 사위어 가는 붉은 주단이 깔렸다. 아내 손을 잡고 노을 진 바다를 바라보다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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