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수필

첫날 밤

by 안규수 2021. 10. 11.

 

   아내를 처음 만나던 날 하얀 블라우스에 녹색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앳된 얼굴에 솜털이 보송보송한 목덜미가 아주 귀여웠다. 나는 검정 학생복을 입고 있었다. 양가에 혼담이 오간 뒤여서 주말이면 자연스럽게 만났다. 봄빛 아련한 냇가에 연둣빛 버드나무 숲은 잎새마다 햇살이 눈 부셨다. 우리는 손을 잡고 둑길을 걸었다. 고등학교 3학년 졸업식 날 전통 혼례를 치르며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장소는 신부 댁 안마당으로 신랑은 사모관대를 신부는 족두리를 쓰고 예식을 올렸다. 이어 신부 댁 안방에서 첫날 밤을 맞았다. 방 뒤편으로 작은 문이 있었다. 잔치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 순간 신부는 뒷문을 가리고 있던 병풍을 윗목으로 치웠다. 동네 아낙네들 문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첫날 밤을 훔쳐보고 있었다. 신부는 촛불도 못 끄게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은근히 옷고름을 풀어 주길 기다리는 눈치가 보였다.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무튼 신혼 첫 밤을 어찌어찌 치루긴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첫 딸을 낳고 2년 뒤 아들을 낳았다. 연이어 두 살 터울로 셋을 낳았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초임 발령지가 고흥 시골 면 소재지 우체국이었다. 시골 단칸 셋방에서 넷째를 낳았다. 그때 처음으로 아내의 산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본가에서는 아내의 산통이 시작되면 엄마는 안방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아내는 병원산부인과를 가 본 적이 없다.

어느 날 퇴근길, 버스가 정차하자 아내가 아이들 손을 잡고 머리에는 덩치 큰 보따리를 이고 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엄마도 막내를 업은 채 작은 보따리를 이고 뒤따랐다. 순간 마음이 울컥해지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얼른 뛰어가 어머니 머리에 인 보따리를 받고 막내를 안았다. 말도 없이 본가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아내에게 왜 시키지 않은 일을 하느냐고 얼굴을 붉혔다. 아내는 그런 날 쳐다보더니 씽긋 웃었다.

  엷디엷은 월급봉투, 힘든 세월이었다. 하지만 알콩달콩 사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아내는 아이들 키우는 재미에 신이 났다. 저녁에 퇴근하면 애들이랑 놀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참새 다섯 마리가 앉았는데 총으로 탕 쏘아서 그중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면 몇 마리 남지? 하는 식의 묘한 산수 공부를 하거나, 해하고 바람이 누가 더 힘이 센가 한 번 겨루어 볼까, 하는 등 이야기 놀이를 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구멍 난 옷을 깁고 짧아진 바지를 늘리며 가난한 살림살이에 푹 빠져 열심히 살았다.

  부지런히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갔다. 엄마가 먼 길 떠나신 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고향을 떠나 순천으로 이사했다. 두 아들이 그곳 명문 고교에 입학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가고, 다들 건강하게 잘 자라 주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일이다.

  40대 초반 무렵, 어느 날 친구가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 있으니 같이 가 보자고 꼬드겼다. 그 시절 한창 유행 하던 사교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넓은 방 안에 남자는 몇 명 없고 젊은 여자들로 가득했다. 그날부터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보름쯤 지난 어느 날 밤에 아내가 현장을 급습했다. 뜻밖에도 함께 춤을 배우던 여자들 가운데 아내 친구가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아내는 지금도 심기가 불편하면 이 일을 들먹이면서 다 늙은 남편 기를 꺾어 놓는다.

  부부간에 신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퇴근 후 집에 들어가자 아내가 애들만 남겨 두고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그길로 오토바이를 타고 처가를 찾아가 장인어른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장인의 불호령은 아내에게 떨어졌다.

  “그런 일로 또 집에 오기만 해 봐. 몽둥이로 다리를 분질러 버릴거여. 못난 것 같으니라고아내는 어서 가자고 내 손을 이끌고 대문을 나섰다.

  어언 60줄에 들어선 아내는 매일 점심 먹고 집을 나선다. 헬스장을 겸한 찜질방에서 또래의 여자들 대여섯 명이 모여서 한나절 내내 손주 자랑하고 신랑 흉보다 6시쯤 되면 집에 돌아와 여보! 밥 줘하고 외친다. 애들이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에게 첫마디가 밥 줘였다. 저녁 먹고 나면 그날 주워들은 너절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는 것으로 밥값을 한다.

  어느 봄날 순천만 남산에 올라 푸른 갈대숲을 바라보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나 없으면 못 살지?”

  엉뚱한 질문에 멋쩍다는 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당신 먼저 가. 내가 먼저 가면 외롭게 홀로 사는 모습이 보기 싫어서 그래. 그 불쌍한 꼴을 차마 어떻게 보냐.

  나의 진지한 눈빛에 그만 홀랑 넘어간 아내는 남편을 바라보더니 얼굴에 웃음기가 가셨다. 지난해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아내는 얼마나 충격이 심했는지 두 눈에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따지듯 대들었다.

  “젊어서 그 고생시키고 이제 겨우 한숨 돌리고 남은 날들 편히 살려고 했는디 또 날 고생시키려고 해! 그게 말이 되냐고?”

  순간 그 말이 생각나 또 울컥했다. 아무리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먼저 가라는 말 듣고 속 좋은 사람 없을 것이다. 뜻밖에 아내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나 먼저 가서 당신 손으로 잘 묻어주고, 무덤에 잔디 파래지고, 당신 내 곁으로 오면 얼마나 좋을까? 지난 주말에 밖에서 점심 먹고 시장 보고 들어 온 날 당신이 들고 온 보따리를 들어 봤어. 무거워서 들 수가 없더라고. 당신 없으면 누가 이걸 들어주나 문득 이런 생각이 나데.” 하고는 한 참 뜸을 들인다.

  “당신 서울 가서 집을 비울 때 텅 빈 방에 혼자 있으면 연속극도 재미없고 허전해 견디기 힘들어.”

  “아이고 다 늙은 할멈 능청 떠는 것 좀 보소.” 하고 웃었더니 아내도 따라 웃는다. 요즘 병원이고 시장이고 둘이 꼭 붙어 다닌다. 간혹 혼자 가면 짝꿍 어디 두고 왔느냐고 묻는다. 이튿날, 아내의 태도가 돌변했다.

  “나 먼저 안 갈 거야. 생각해봐. 당신 없는 그곳에 나 혼자 어떻게 살아.”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내가 먼저 갈 것이 분명한데 아내는 먼저 가는 것이 싫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이야기를 들으시면 웃으실 것 같다.

  “먼저 가고 나중에 가는 것은 우리가 상관할 일 아니야. 하나님 뜻이지. 그저 사는 날까지 재미있게 살다 가면 되지, 안 그래?”

  아내는 말없이 웃었다. 아내는 언제나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처음 만나던 날 솜털이 보송보송한 앳된 얼굴이 스쳐 지나 갔다.

 

 

'나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팝나무꽃 필 무렵  (0) 2021.10.11
비긴 어게인  (0) 2021.10.11
둥구나무  (0) 2021.10.11
댓 꽃 피는 마을  (0) 2021.10.11
눈 내리는 날  (0) 2021.1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