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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필

비긴 어게인

by 안규수 2021. 10. 11.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내심 준비 중이었다. 엄마는 대학 이야기만 나오면 호통을 치셨다.

  “이놈아! 각시 놔두고 어디 객지를 나가?”

  핑계가 그럴듯했다. 나는 강하게 반발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밤이면 산등성이 위로 쏟아지는 별을 바라보고 서러워했다. 한동안 농사꾼이 될까 하다가 그 꿈마저 접고 공부한다고 골방에 박혀 서너 달 지내기도 했고, 친구 집을 전전하면서 집을 빙빙 겉돌았다. 아내도 견디기 어려운 시련기였다.

  2년 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고흥 어느 우체국에 첫 발령을 받아 가족을 데리고 갔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아이들의 교육까지도 아내 몫이었다. 아내의 가사 노동력은 경제적 가치로 논할 수 없다. 오직 희생과 사랑만이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지난여름 제주도 여행을 떠나는 아침이었다. 아내가 갑자기 변덕을 부렸다. 여행 갈 준비를 다 해 놓고 안가겠다고 선언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집을 나가 버렸다. 손주 지승이 경민이랑 협재해수욕장에서 놀다 올참이었다. 애월에 있는 펜션을 예약할 때만도 그렇게 좋아하더니 왜 그럴까? 아내는 요즘 갱년기를 겪고 있다.

  아내가 새로 구입한 수영복을 입고 내 앞에 서서 물었다.

  “어때? 이렇게 입으면 덜 뚱뚱하지?”

  “아니, 별로인데.”

  50대의 아내 몸은 어느새 날씬한 몸매는 오가는 데 없고 뚱뚱한 데다 아랫배가 불쑥 나와 볼품이 없었다. 그동안 살 뺀다고 헬스장에도 다니고 산책도 열심히 했지만,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자꾸 살이 빠져 고민이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데 원인을 모르겠다. 한 가지 변화라면 집안에서 처지가 갑에서 을로 바뀐 것뿐이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뚱뚱해 보여?”

  순간, 또 실수했구나 싶어 후회막심이다. 하루에 열 번도 더 변덕이 심한 아내 눈치를 살피는 처지다. 인생살이 처하태평(妻下太平)인 내 주제에 자신의 용모를 물어올 때는 조심해야 하는데 그만 투박하게 내뱉고 만 것이 화근이었다. 제주 여행은 손주 둘과 나, 셋이서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평생을 몸담았던 직장을 퇴직한 뒤, 아침마다 산에 오를 때면 곧잘 따라나서더니 요즘은 통 그러질 않는다. 그와 나 사이에 조금씩 간격이 생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한 지붕 밑에서 서로 딴전을 벌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는 거실에서 연속극에 푹 빠져 있고 나는 PC만 가지고 놀고, 이렇듯 매사에 서로가 겉돌았다.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제 길 찾아 하나둘 둥지를 떠나자 갑자기 벽에 걸린 시계가 멈춘 기분이 들었다. 아내는 매일 주인 잃은 빈방을 쓸고 닦았다. 그는 말이 없다. 젊어서부터 나에 대한 그 억척스럽던 관심이 무관심으로 바뀐 것이다.

무심한 세월이 죄라면 죄다. 자식들 키우고 남편 수발하다 좋은 시절 다 보내고 어느새 조금씩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서글프고 허전한 모양이다. 그의 건강도 예전 같지 않다. 그의 몸이 금이 가고 닳고 하면서 세월의 지문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놓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집에만 들여 박혀 지내는 삼식이 남편 뒷바라지도 버거운 눈치다.

  어느 날 아침이다. 거실에 앉아 있는 나에게 제발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 놀다 오라고 호통을 친다. 벌써 남편이 귀찮고 버거워진 것일까. 그길로 책 한 권 들고 집을 나와 도서관에서 하루를 보내고 저녁 무렵에 집에 들어갔다.

  요즘 나는 부쩍 늙어 가고 있다. 갑자기 모든 일에 자신이 없어지고 혼자인 것 같은 외로움이 엄습하기도 한다. 그날따라 발걸음은 어딘가 허전하고 무거웠다. 아내는 저녁상을 차려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 집에만 붙어 있지 말고 옛날처럼 해. 밖에 나가서 친구들도 만나고 그래. 나는 그게 좋아.”

  가을이다. 여름이 열정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감성의 계절이다. 맑고 높은 하늘, 따스한 햇볕과 선선한 바람, 산에는 울긋불긋 오색단풍이 물들어간다.

  아내와 모처럼 극장을 찾았다. <비긴 어게인> 영화 제목 그대로 인생 제2막을 다루는 작품이다. ‘키아라 나이틀리가 부르는 주제 음악 ‘Tell Me If You Wanna’가 전편에서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영화에는 사랑, 후회, 기회 이별과 같은 감성적 언어가 음표처럼 떠돌았다. 실패와 배신, 이별과 같은 어두운 단어들이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의 감성을 통해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설 때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따뜻한 체온이 전해 온다. 이처럼 따뜻하고 고마운 느낌이 사랑일까. 진정한 사랑이란 육체적인 것도 낭만적인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바람 끝이 다소 차갑지만,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밤길을 걸었다. 길가 풀숲 어디선가 귀뚜라미가 짝을 찾고 있는 듯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스크린 전편에 흐르는 음악이 우리가 걷는 길 위로 흘렀다. 인생과 사랑을 일깨우는 음표와 선율이 길을 따라 반딧불처럼 날았다.

  아내는 누가 보아도 억척스러웠다. 그는 늦었다고 뛰는 법도 없고, 이르다고 쉬는 법도 없고, 힘들다고 태업을 한 적이 없다. 일정한 걸음으로 꾸준히 걸어 여기까지 왔다. 한 남자의 아내로, 아이들 엄마로만 살아왔지 정작 자신의 삶은 없었다. 더 늦기 전에 아내의 참모습을 찾아주고 싶었다.

  “지금부터 당신 하고 싶은 것 있으면 마음대로 해봐.”

  아내는 한 마리 조롱안의 새였다. 새장 문을 열고 창공으로 훨훨 날려 보내고 싶지만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그저 빙그레 웃고만 있다. 나는 팔을 들어 아내를 가만히 안았다.

  “우리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 인생은 60부터라 했어.”

  웬일인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하늘의 별들이 그날따라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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