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벨이 울리면서 화면에 친구 K의 이름이 떴다. 그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했다.
“네 얼굴 보고 싶어 내려간다.”
전주 요양병원에 계신 아버지를 뵙고 지금 막 순천행 버스에 올랐다고 했다. 서울에서 홀로 지내는 그는 가끔 이슥한 밤에 내게 전화하는 버릇이 있다. 얼마 전엔 술에 젖은 목소리로 죽고 싶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이젠 나도 그의 말에 면역되어 들은 채만 체한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다. 그는 왜 아내에게 돌아가지 않는 걸까?
그는 동갑내기로 젊은 시절 시골 면 소재지에 있는 A 협동조합에서 10여 년을 함께 근무했었다. 미남형의 용모에 화통한 성격인 그는 친구를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다. 마당발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친구들이나 이웃들의 온갖 대소사에 얼굴을 들이밀지 않는 데가 없었다. 그때 우리는 퇴근 후 밤늦도록 바람난 고양이처럼 붙어 다녔다. 고주망태가 돼 집에 들어가면 아내는 나 보다도 그를 원망하는 눈치였다. 인정 많은 그에게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그것은 공과 사를 구별 못 하고 청탁을 냉정하게 거절 못 하는 무른 성격 때문이었다.
십여 년을 그와 함께 근무하다 다른 지역 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지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A 조합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A 조합은 곧 본부의 감사가 시작되면서 사건의 경과가 속속 밝혀졌다. 그 조합은 간척지를 끼고 있는 곡창지대로 미곡 종합 처리장(방앗간)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 공장에서 생산된 양질의 쌀을 서울 등 대도시로 출하하고 있었다.
당시 쌀 시장에는 사기꾼들이 많았다. 그들의 수법은 교묘하고 치밀했다. 처음에는 쌀을 현금으로 구매하여 신용을 얻은 뒤 점차 거래량을 늘린 뒤 급기야 엉터리 부동산을 담보로 30억 원이 넘는 쌀값을 떼어먹고 잠적해버린 것이다. 이상한 것은 일이 이렇게 되도록 직원 누구 한 사람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원인이 된 담보물의 감정 자가 바로 친구 K였다. 담보 물건은 서울 한강 근처 아파트 부근 맹지(盲地)로 사실상 매매가 불가능한 토지였다. 시가로 5억도 안 되는 땅을 무려 열 배 가까이 부풀려 감정가를 매겼다.
이 사건은 신문, 방송 등 매체를 타고 전국에 알려졌고 조합장은 모든 책임을 떠안고 구속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직원 중 다수가 직간접으로 연루되어 징계를 받고 타지로 전출되거나 퇴출당했다. A 조합은 2년 뒤 경영 부실화로 이웃 조합에 흡수합병되고 말았다. 그 지역 농민들의 사랑 속에 성장하던 조합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K는 결국 이 사건으로 면직의 중징계를 받아 회사를 떠났다. 그에 따른 변상 책임도 피할 수 없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비롯한 가산은 압류되고 광주에 있는 아내 명의의 집마저 소송이 들어올 기미가 보이자 어쩔 수 없이 이혼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정이 허무하게 무너져 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내 마음도 견디기 힘들었다. 밤이면 술집에 앉아 그의 한숨 소리를 안주 삼아 폭음을 일삼았다.
어느 날 술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눈빛은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다.
“이러고 있지 말고 다시 일어서야 할 것 아니냐?”
나는 다그쳤고 그는 괴로운 듯 긴 한숨을 내쉬며 술잔만 비웠다. 한 달쯤 뒤 그의 음독 소식이 들려왔다. 순간 눈앞이 캄캄했다. 다행히 일찍 발견해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병원에서 퇴원한 그는 아버지를 모시고 막연히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했다. 그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 선후배들이 여비를 마련하여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친구들도 그의 딱한 소식을 듣고 변두리에 지하 단칸방을 마련해 주고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낯선 객지 생활은 고달프고 어렵기만 했다. 쥐꼬리만 한 월급은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살아가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 가운데도 지병에 가벼운 치매 증세까지 보이는 구순의 아버지를 지극 정성으로 모시다가 이태 전 여동생의 도움으로 전주 요양병원으로 모셨다. 아들조차 못 알아보실 정도로 치매가 악화하여 침대에 손발이 묶인 채 누구를 기다리는 듯 초점 잃은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고. 병원에 갈 때마다 아버지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에 밟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단다.
몇 년 전 이른 봄 그를 만나려고 서울에 갔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 탓도 있겠지만 야윈 몸, 까칠한 얼굴이 어디에도 예전 호탕하던 그의 모습은 간 곳 없었다. 그의 손을 덥석 잡는 순간 그 거칠하고 뻣뻣한 감촉에 눈물이 날 뻔했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포장마차로 갔다. 도심의 저녁 포장마차에는 직장인과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로 가득했다. 좁은 홀에 끼리끼리 모여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술기운으로 풀고 있었다. 우리도 그들 사이에 끼어 허리띠를 풀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웃고 있었다. 젊어 한때 그와 마시던 술맛이 다시 살아났다. 그는 술기운이 거나해지자 그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하나둘 풀어 놓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다. 그까짓 돈 몇 푼에 내 양심과 인생을 팔아먹어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처음 듣는 그의 진솔한 고백이었다.
“감정 출장 차 서울에 올라와 강남 요정에서 접대를 받았거든. 그날 밤 술독에 빠져 정신을 잃었어.
“에라이 이놈아! 그 술잔이 독배인 줄도 모르고….”
긴 한숨을 내 쉬었다. 흠칫 놀라 나를 바라보던 그가 고통스러운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연거푸 술잔을 비우고는 눈물을 펑펑 쏟았다. 눈을 질끈 감은 그의 얼굴은 온통 이마며 볼이며 목이며 주름투성이였다. 감은 눈마저도 하나의 주름에 불과했다. 그 깊은 주름과 주름들로부터 솟구치는 눈물이 주름과 주름들의 경계를 무자비하게 범람하면서 볼을 적시고 가슴으로 흘러 이윽고 강이 되어 출렁이며 나를 덮쳐왔다. 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홀 안에 다른 손님들은 다 자리를 뜨고 우리 둘만 남았다.
“마누라는 내가 서울로 올라온 후 안 해본 일이 없어. 몸도 약한 사람이 눈물겹게 두 아들을 키웠다.”
그런 아내가 아프단다. 어디 한 곳 딱 아픈 데가 없으면서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픈 것 같단다.
“니놈이 곁에 있어 주면 낫겠지.”
“그럴까?”
고개를 수그리는 그의 목덜미는 검붉었고 관자놀이가 심하게 팔딱거렸다.
“내 생각엔 차라리 내가 없어지면 더 나을 것도 같은데….”
“이놈아, 그만 잊자. 지난 일들 잊고 서울 생활 그만 청산하고 집으로 내려가자.”
그는 술이 확 깨는 듯 정색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마누라가 그만 내려오라고 해. 하지만 난 절대 못 간다. 그 여자를 바라보고 살 면목이 없다. 그냥 이대로가 마음이 편해. 얼마 안 되지만 월급 받아 몇 푼이라도 부쳐주면 며칠은 마음이 편하다.”
그의 고독한 방랑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어깨에 진 짐을 스스로 내려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니, 죽을 때까지 그 짐을 벗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도착할 시간에 터미널로 갔다. 그가 정류장을 빠져나오며 한 손을 번쩍 들고 싱긋 웃었다. 우리는 순천만 정원과 갈대밭을 걸었다. 초록이 무성한 갈대숲은 바람에 휩쓸리며 쉼 없이 출렁거렸다. 싱싱한 생명력으로 가득한 갈대숲 사이로 그가 휘적휘적 걸어 들어갔다. 굽은 등에 한 생애의 고달픈 삶이 오롯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부정할 수 없는 쇠락의 나이로 접어든 우리. 시간은 공평해서 삶의 궤적이 서로 다를지라도 육신이 늙어간다는 것은 똑같다. 나는 그저 바람 부는 대로 평범하게 살아온 인생이다. 그의 삶은 파란만장한 곡절이 남다르다. 그는 아직도 고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는 자기 삶을 어느 때보다도 또 그 누구보다도 뜨겁게 불사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용산전망대에 올랐다. 너른 개펄 너머 야트막한 서쪽 산에 걸린 해가 진홍빛 노을을 한껏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 안았다. 그의 얼굴이 개울에 발을 담그고 삽을 씻는 농부처럼 평온하다. 바다 위 낮게 드리운 먹구름에도 찬연한 붉은빛이 물들어갔다. 그는 상경 기차 시간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룻밤 묵어가시게.”
“내일 근무는 어떡하고?”
그가 탄 버스가 떠난 뒤에도 나는 짙게 내려앉은 어둠을 응시하며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