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내게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며 그나마 가장 큰 낙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넷플릭스를 통해 해외의 완성도 높은 영화를 감상하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다. 울림 있는 영화 한 편을 감상하고 난 후 깊은 감동의 여운이 오래 지속되는 것은 꽤 중독적이고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 생애 처음으로 읽은 소설은 형 책상 위에 있던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이었다. 세인트피터즈버그 마을의 소문난 말썽꾸러기 톰 소여와 친구들의 모험을 담은 이야기는 나에게 소설의 흥미와 재미를 알게 해준 고마운 책이었다. 다음으로 읽은 책이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 단편 선이다.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을 읽고 느꼈던 자릿한 감동은 지금도 내 기억에 선명히 남아 있다. 이런 책들은 어린 나에게 곧 넷플릭스였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읽은 고전소설이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고 어린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최근 톨스토이 단편선(김종렬엮음)을 먼지 낀 책장에서 꺼내 들었다. 어릴 적 묵직한 감동을 선사해 준 책이어서 가까이 두고 자주 읽는 책이다. 그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라는 단편은 삶의 온도를 따스하게 올려주는 톨스토이의 이야기들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감동적인 작품이다.
미하일은 하나님의 벌을 받는 천사였다. 어느 날 하나님으로부터 한 여인의 영혼을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제 막 쌍둥이 딸을 낳은 여인이었다. 여인은 천사를 보고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다며 영혼을 거두지 말아 달라고 애원한다. 천사 미하일은 차마 이 여인의 영혼을 거두지 못하고 빈손으로 하늘나라로 돌아간다. 그러자 하나님은 다시 내려가 산모의 영혼을 거두라 명하시며, 네가 세 가지 말의 뜻을 알게 되면 다시 하늘나라로 올라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인간의 내부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천사 미하일이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지상의 교회 앞에 헐벗은 채 쓰러져 있었다. 이때 구두 수선공 세몬이 미하일을 발견하고 자기 옷을 입혀서 집으로 데려간다. 그의 아내는 이 남자의 딱한 사정을 듣고 저녁 식사를 정성을 다해 대접한다. 그때 미하일은 처음으로 세몬의 아내 마트료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리고 1년 후 구둣방에서 어느 부자가 1년을 신어도 끄떡없는 장화를 만들어 달라며 귀한 가죽을 들고 와 거들먹거린다. 그때 미하일은 그 부자 뒤에 서 있는 천사를 알아보고 두 번째로 씩 웃었다. 그는 부자가 나간 뒤 가죽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재단하기 시작했다. 점심때가 되어 세몬이 미하일이 만든 구두를 살펴보니 장화가 아니라 슬리퍼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순간 그는 깜짝 놀란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장화를 주문한 그 부자의 하인이 가게로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주인이 죽었는데, 죽기 전 그 구둣방에 가서 이제 장화는 필요 없게 되었으니 그 가죽으로 죽은 사람에게 신기는 슬리퍼를 지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미하일이 이 땅에 내려온 후 6년째 되던 날, 구둣방으로 쌍둥이 자매를 데리고 한 여인이 찾아와 아이들 구두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한다. 이 여인은 애들 엄마가 쌍둥이 딸을 낳자마자 죽었고, 그 아이들 아빠도 아이들이 태어나기 일주일 전에 죽었다고 말한다. 미하일은 이 아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곱게 자란 아이들을 보고 놀란다. 남의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보람을 느끼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여인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미하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고 천장을 쳐다보며 세 번째 방긋 웃었다. 순간 미하일의 몸을 환한 빛이 감싸고 있었다. 세몬이 미하일에게 그렇게 세 번 웃는 이유와 몸에서 환한 빛이 나는 이유를 물었다.
“제 몸에서 빛이 나는 것은 하나님의 벌을 받은 제가 방금 용서를 받아서였고, 또 제가 세 번 씽긋 웃은 것은 하나님의 세 가지의 말뜻을 알아냈기 때문입니다. 그중 첫째 말씀은 댁의 아주머니가 식사를 준비할 때 깨달았고, 두 번째는 덩치 큰 신사가 장화를 주문하려고 왔을 때 알았지요. 세 번째는 곱게 자란 두 여자아이를 보고 깨달아 다시 웃은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이웃의 사랑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미하일은 마침내 천사들의 찬송을 들으며 불기둥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최근 입양아 정인이 사망 사건이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말 한마디 못 하는 고작 16개월밖에 되지 않은 정인이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이 우리 사회 전역을 뒤덮었다. 이번 사건이 우리나라가 그동안 아동학대 범죄에 얼마나 관대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고 부끄러운 일인지 알게 되었다. 내 주위를 살펴보고 진심으로 반성하고 성찰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이러스나 기생충은 숙주가 있어야 살 수 있다. 지구는 태양 에너지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고, 태양계는 우주와 교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이것이 진정한 초연결 사랑이다. 우리는 이 자명한 진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우리를 바이러스나 기생충으로 만든 숙주가 대체 누구인지 따져보았으면 좋겠다. 누가 우리의 숙주였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자문자답을 하다 보면 문제의 근원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오늘따라 톨스토이 작품 속 “타인을 돌보는 마음, 그 사랑이 있기에 사람은 오늘도 살아있다.”라는 묵직한 메아리가 되어 폐부를 날카롭고 깊숙이 찌르는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