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총' 그 슬픈 이야기
몇 해 전 고향을 찾았다. 어스름이 깃들기 시작하자 그믐달이 제석산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밤마다 스스로 몸을 조금씩 깎아 내는 그믐달은 스산하게 흐렸다. 달빛은 어둠을 제대로 사르지 못했고, 어둠은 달빛을 물리치지 못하고 있었다. 당산에서 뒷산 잿몬당을 바라보니 항상 의연한 모습으로 나를 반기든 소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마을의 역사를 온몸에 새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알고 있는 소나무, 그마저 사라지고 없으니, 순간 외딴 섬에 홀로 남겨진 듯한 외로움과 격정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때 나는 겨우 다섯 살이었다. 해가 질 무렵에 집 앞 도로에서 놀고 있을 때 저만치서 군인들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었다. 군인들이 우리 집 앞에서 가마니를 덮은 들것을 내려놓았다. 들것에는 총을 맞아 피범벅이 된 반란군이 실려 있었다. 소란에 놀란 엄마가 집에서 부리나케 나오셨다. 그는 엄마에게 손짓하며 신음했다.
“물, 물!”
엄마는 샘물을 한 바가지에 떠서 그에게 먹였다. 엄마가 그에게 무어라고 한마디 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다. 어머니는 얼른 내 손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때가 여수․순천 사건의 막바지였고 군인들은 징광산에서 준동하는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오는 군인들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년 때쯤 눈발이 휘날리는 한 겨울밤이었다. 우수수 울타리를 할퀴고 지나가는 매운바람 소리와 달리 방안은 화롯불의 온기로 그지없이 안락했다. 타고난 이야기꾼인 엄마는 평소 들려주시던 장화홍련전 등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와 달리 1948년 10월에 있었던 여순사건 당시 우리 가족이 당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주시면서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시기도 했다.
가을 추수가 한창이었던 시월 중순쯤이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들일을 하다가 느닷없이 벌교 쪽에서 콩 볶듯 쏘아대는 총소리를 들었다. 그때 여수 순천을 삽시간에 점령한 반란군이 ‘해방군’을 자처하며 벌교로 들이닥친 것이다. 힘 있는 자나 지주들의 수탈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들은 새 세상이 열리는 줄 알고 내심 반겼다고 한다. 그 여파로 동네서 머슴 살던 젊은 청년 두 명이 반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들은 벌교를 점령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우익인사 처단이었다. 해방군이 소위 반동분자라고 지칭하는 사람은 마을 유지들과 지주들, 그리고 군인과 경찰 가족이었다. 세상이 바뀌자 그들은 이성을 잃고 지주들과 지주들 밑에서 거들먹거리든 사람들, 평소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벌교 남 초등학교 교정에 모아 놓고 소위 인민재판을 열었다. 아버지는 들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시다 대문 밖에서 붉은 완장을 찬 낯선 청년들에게 연행당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곳은 읍내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끌려와 있었다. 곱게 물든 단풍잎이 갈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운동장 가에는 끌려온 이들의 가족과 구경꾼들이 운집해 있었다. 아버지를 뒤따라온 엄마와 작은누나도 그 군중 속에 끼어 가슴 조이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 사이에 ‘손가락 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운동장에 잡혀 온 사람들 사이를 누비는 붉은 완장을 찬 젊은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면 곧바로 끌려 나가 총살을 당해 사람의 손가락이 바로 총구멍이나 다름없어 생긴 말이었다. 당시 힘 있는 인사들이 줄줄이 끌러 나가 운동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 앞에 세워졌다. 곧이어 인민재판이 시작되고 간부인 듯한 사람이 호명하면서 죄목을 열거했다.
“이 사람은 인민을 수탈한 인민의 적이요, 처단해야 하오.”
이렇게 운동장이 떠나갈 듯 쩌렁쩌렁 소리 지르면, 기다렸다는 듯 앞자리에 포진한 몇 사람이 옳소, 옳소, 손들고 손뼉 치면 그만이었다. 선고가 모두 끝나면 사람들은 곧바로 굴비 엮듯 묶어져 소화다리(부용교)로 끌려갔다. 소화다리 난간에 일 열로 세워 놓고 발목에 새끼줄을 묶은 뒤 방아쇠만 당기면 다리 밑으로 사라졌다. 다리 아래 갯바닥에는 시체가 질펀하게 널렸고, 바닷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었다. 다리 양쪽에 둘러선 가족들의 통곡에 하늘도 슬피 울었다. 이런 일이 한나절 내내 계속되었다고 하니 엄마 기억으로는 처형당한 사람이 백 명도 넘었다고 술회했다.
아버지는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용케도 살아남으셨다. 지주는 아니어도 괜찮은 살림에 머슴까지 둔 마을 유지가 저승사자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인민재판에서 아버지는 작은매형 친구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목숨을 건진 것이다.
방죽에서 이 처참한 광경을 직접 목격한 엄마는 피 냄새 진동하는 끔찍한 현장을 말씀하시면서 아픈 가슴을 쓰다듬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눈 뜨고는 못 봐. 발목이 묶인 시체가 다리 밑으로 뚝 떨어지면 통곡 소리가 하늘을 찔렀어야. 아이고! 이런 시상이 어딧냐, 생지옥이여 생지옥!” 하시며 치를 떨었다. 남편이나 아들이 그렇게 죽는 모습을 바라본 여인들은 혼절했다. 그날 밤 가족들은 다리 밑 시체를 수습해 집으로 모셔 가 한밤중에 동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상여도 없이 가마니에 시체를 둘둘 말아 장사를 치렀다고 한다.
파죽지세로 고흥 보성을 점령한 반군은 얼마 못 가 전세가 급반전되었다. 군경 토벌대에 쫓긴 순천지역 반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고, 벌교 방향으로 진출한 반군은 우리 마을 뒷산인 징광산으로 숨어들어 저항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진압에 성공한 토벌군과 경찰들에 의해 똑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날이 지날수록 이곳저곳 소문들이 꼬리를 달고 은밀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좌익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몽둥이로 때려죽이거나 대창으로 난자해 죽인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졌다. 벌교에서도 그런 끔찍한 소문이 현실로 이어졌다. 가족을 잃은 군경은 반란군에 가담한 자들과 그 가족을 뱅골재 골짜기로 데려가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그때 사람들은 반란군을 ‘산사람’이라고 불렀다. 낮과 밤의 주인이 바뀌었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산 사람들이 지배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밤이면 산 사람들이 마을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고 젊은 남자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낮에는 경찰들이 마을로 들어와 식량을 약탈당한 사람들을 부역했다는 죄목을 부쳐 주민들을 괴롭혔다. 그 혼란이 주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컸다. 그들은 두 주인에게 순종하면서 갈대처럼 살 수밖에 없었다. 자칫 어느 한쪽에 밉보이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오직 맹종만이 힘없는 백성들의 살길이었다.
밤이 되면 어린이와 노인만 빼고 젊은 남자들은 모두 읍내 학교로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돌아와야 했다. 경찰이 주민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소개(疏開)를 했다. 아버지는 날이 저물면 형과 작은매형을 데리고 읍내로 나가셨다. 작은매형은 우리 집에서 머슴 살다가 작은누나와 눈이 맞아 데릴사위로 살고 있었다. 신혼인 매형은 그들에게 동조하지 않는다는 명목으로 반동분자로 지목받아 살해 위협을 받고 있었다.
이듬해 봄이었다. 어느 날 밤 새벽 작은 매형이 감기·몸살로 집에 있다가 이웃의 밀고로 산 사람들에게 붙들려갔다. 그들은 매형을 뒷산 잿몬당 소나무 밑으로 끌고 가 인민재판을 열고 사형선고를 내리고 죽창으로 무참히 처형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스물다섯 청년은 그렇게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날 밤 동네에서 매형과 함께 끌려간 또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면서 어둠이 깔린 처낙골 낭떠러지로 몸을 날려 탈출에 성공했다. 그가 그날 밤 진상을 아버지에게 소상히 전해 줘 매형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그는 가족을 이끌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초등학교 6학년 가을, 재 너머 산에 들국화 뿌리를 캐러 엄마를 따라나섰다. 저물녘 엄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나는 작 보따리를 등에 지고 내려오다 잿몬당 소나무 치마 바위에서 잠시 쉬어 가자고 하시면서 보따리를 내려놓고 말문을 여셨다. 전란이 끝난 2년 뒤 엄마는 누나와 함께 소등처럼 길고 둥그런 능선을 따라 매형의 시체를 찾아 나섰다. 봄빛이 완연한 징광산 자락에는 참꽃이 붉은빛을 토하며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잘려 나간 소나무그루터기는 아직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고, 몸서리쳐지는 학살의 현장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망각의 늪에 빠진 채 평화로웠다. 산 사람들은 양민들을 처형한 뒤 시체를 땅에 묻지 않고 돌무덤을 만들었다. 후에 유가족이 찾기 쉽도록 배려한 것으로 보였다. 수십 기가 널려 있는 그 많은 돌무덤을 일일이 헤쳐보고 다시 쌓길 무려 열흘 만에 매형의 유골을 찾았다.
작은누나는 남편의 시신을 찾은 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이 이상해졌다. 걸핏하면 남편이 차마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최후를 마친 잿몬당 소나무 아래에서 넋을 놓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별의별 좋다는 약은 다 써 보고, 신랑의 원혼이 씌웠다고 씻김굿도 하고, 당 골래 굿을 해도 차도가 없었다. 부모님의 애간장은 타들어 갔다. 삼 년여를 그렇게 앓던 누나는 스물넷 젊은 나이에 어린 딸을 두고 외롭게 남편 곁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너 작은 누나가 서방 잃어 뿔고 미쳐서 여기서 죽었다.”
엄마 눈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우고 끝내 “아이고 불쌍한 것” 하시면서 눈물을 쏟으셨다.
엄마의 두 번에 걸친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돌멩이처럼 길가에 박혀 침묵하고 있는 이야기를 막대기로 파내는 것, 한 번도 쓰인 적이 없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상기하는 일이다. 나는 이 글을 쓰는 내내 유랑流浪의 길을 떠도는 것 같은 외로운 엄마의 모습이 아른거려 눈시울을 적셨다. 엄마는 피할 수 없는 삶의 고통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도리어 그 고통이 이야기 속을 빠져나와 내 살갗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작은누나를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음식을 끊고 술만 드시면서 두문불출했다. 술이 거나하면 신음처럼 토하시던 한 마디에 식구들은 먼 산만 바라보고 한숨만 쉬었다.
“놈(남) 탓할 것 없어, 모두 다 내 탓이제. 그 무신(무슨) 사람 못 할 일이여, 그땐 영축웂이(영락없이) 죽은 목숨인 줄 알았제, 살아있는 것이 꿈이제. 그러니 느그들 걱정뿐이더라고. 나 죽으면 짠한 느그들 어쩌고 살 거냐.”
아버지는 왜 그걸 당신 탓으로 돌리고 만 것일까? 분노보다 먼저 체념을 익혀야만 하는 일은 힘없는 백성들의 생존 법칙이었다. 근대사의 격랑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짊어진 삶의 질곡은 참으로 가파르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버지의 탄식은 침묵으로 변해서, 그 불모 한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다. 고통이고 형벌인 그 기억을 잊으려고 안간힘을 다하셨으리라. 오직 침묵과 체념만이 그나마 남은 가족을 지키고 당신의 목숨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놈한테 신세지지 말고, 척(원수) 지지 말어.”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말씀. 그 깊은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아버지인 동시에 힘없고 이름 없는 민중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제의 이웃에게 죽임을 당하고, 믿고 의지한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매형을 밀고한 이웃은 아버지와 호형호제하는 이웃이었으니 그 배신과 분노는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걸 따져볼 길조차 없는 무기력에 대한 절망은 또 다른 분노이며 공포였다. 이 전란으로 매형과 누나뿐만 아니라 좌우익 가릴 것 없이 너무도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아직 정확한 사망자가 몇 명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들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사상이나 이념 따위는 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 이념의 파고는 아무 죄 없는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삼켜버렸다. 무자비한 폭력 앞에서 그들의 죄목은 오직 하나 ‘농민’이라는 이름이었다.
총이 곧 법이었다. 원한과 복수가 그 총을 들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던 세상에서 누군가의 심장을 구멍 낸 총알은, 시간이 지나 총을 쏜 그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혼돈의 아귀다툼 속에서 좌. 우 모두 미쳐 날뛰던 그때, 내 편이 아니면 무조건 죽여야 했던 그들을 누가 단죄할 것인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늘 죄 없고 힘없는 백성을 가장 먼저 짓밟는다는 사실을 방증할 뿐이다. 여수 순천 10.19 사건은 좌우 이념 대결의 정치 행위였다. 결국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이용하고 학살했다. 가난한 백성들이 보호받아야 할 나라로부터 버려지고 저주를 받았으니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13세기 몽골의 침입을 피해 산으로 바다로 쫓겨 갔던 고려 유민들의 힘겨운 삶을 담고 있던 청산별곡! 그 노래는 희생당한 농민들의 원혼을 달래고 있다.
‘어디로 던지려는 돌인고, 누구를 맞히려는 돌인고, 미워할 이도, 사랑할 이도 없이 맞아서 울고 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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