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암(仙巖)은 절 서쪽 높이가 십여 장 되는 면이 평평한 큰 돌 이름으로 옛 선인이 바둑을 두던 곳이다. 선암사라는 절 이름은 이 바위에서 유래 되었다고 한다. 남도의 끝자락 순천 천년고찰 선암사에는 600살 이상 된 나무만 해도 무우전(無憂殿) 옆 매화 서너 그루, 무량수각 앞에 누운 소나무, 지장전 위엔 영산홍, 자산홍 열댓 그루, 칠전 차밭의 700살 넘은 차나무가 있다. 모두가 선암사 부처님이다. 선암사를 두고 미술사가 유홍준 교수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은 한글·청자·산사이다. 그 산사의 대표로 선암사를 꼽는다”라고 했다.
선암사는 이 근방 가난한 농민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고 보듬어 주는 절이다. 남쪽으로 30리쯤 낙안읍성을 지나 내 고향 벌교에 가면 홍교(虹橋)가 있다. 선암사 4차 중창을 한 호암스님이 큰물만 나면 떼다리(筏橋)가 떠내려가 고생하는 농민들을 위해 승선교와 같은 홍예교를 축조했다. 벌교라는 지명은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부처님 은혜에 감읍한 농민들은 선암사 중창 때 모두 나서서 힘을 보탰다. 그들은 벌교 땅에 그나마 뿌리내리고 살게 된 게 모두 선암사 부처님 은덕이라 믿었다. 내가 어릴 적 어머니는 사월 초파일이면 공양미를 머리에 이고 삼십 리 길을 걸어 선암사에 다녀오셨다.
매표소를 지나 널찍한 신작로에 들어섰다. 짙은 숲 그늘에 가려 있지만, 넓은 도로가 마음에 걸린다. 내가 고교 2학년 처음 절을 찾았을 때는 시내가 졸졸 흐르고 갈참나무 숲에 묻힌 호젓한 좁은 산길이었다. 단 하나 남은 옛길은 작은 승선교에서 큰 승선교로 이어지는 신작로 맞은편 오솔길이다. 작은 승선교 아치엔 큰 승선교가 담겼고, 큰 승선교 아래 맑은 물에는 강선루가 가득하다.
강선루를 들어서면 부처님 영역이다. 삼인지를 지나면 단청이 날아간 일주문이 고풍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다. 어느 도량이든 대웅전 앞에 서면 마음도 달라지고, 눈빛도 새로워진다. 그것이 오랜 세월을 간직한 법당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먼 것’이 주는 막연함이 알지도 못하는 기억을 찾아가기 때문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건물 하나하나는 다른 사찰과 다를 게 없다. 절 건물 구조가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진 것은 비탈진 지형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지어졌다.
절집 담, 뒷문, 부엌살림도 모두 눈높이보다 낮다. 담장 돌은 호박돌, 그 높이는 고작 가슴에 맞췄다. 종정 스님이 머무는 무우전 돌담이 가장 허술하고, 왕실의 원당이라는 원통각의 뒷문으로 향하는 담장은 한없이 낮게 깔렸다. 응향각과 설선당 사이 돌담, 그리고 해천당 돌담의 이끼 낀 돌은 정이 깊다. 절이 자연과 더불어 천년의 세월이 흘러도 품위를 잃지 않고 겸손하고 아름답게 늙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르겠다. 전국 유명사찰 어디를 가나 새로 지은 절집이 번드르르하다. 한마디로 천 년 묵은 가람의 고풍스러운 맛과 분위기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호암스님이 중창할 땐 대웅전 심검당, 설선당, 만세루, 대웅전이 고작이었다. 상월당스님을 거쳐 해붕스님이 중창 후 건물만 오십여 채로 늘어나 오늘의 모습을 갖췄다고 한다. 고승들은 자연과 공존하는 불사를 일으켰다. 그 예로 일주문을 지나면 모든 사찰이 다 가지고 있는 사천왕이 없다. 절 뒤편 조계산 정상이 장군봉이니 그 졸개인 사천왕을 둘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인위(人爲)를 최소화했다는 말이다. 산과 계류의 흐름, 지세의 넓고 낮음에 충실히 따랐다. 인위와 무위(無爲)가, 자연과 절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셈이다.
선암사는 고 매화를 비롯하여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향기가 고풍스러운 절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그런 수종만 백 종이 넘는다. 그 나무들이 꽃과 향을 공양하니 부처님이 얼마나 행복할까. 이른 봄, 조계산 양쪽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시내는 주변의 붉디붉은 진달래꽃과 어울려 신선들의 풍류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반쯤 돋아난 여린 잎새 사이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볕이 퍼지면 생강나무가 제일 먼저 꽃을 피우고, 무우전 돌담길의 달콤한 홍매 꽃망울이 맺히면 산과 물 사이로 무르익어가는 화음은 교향악이 되어 겨우내 얼어붙은 마음을 훈훈하게 녹여준다.
어언 300살이 넘은 매화나무는 껍질에 더덕더덕 붙은 세월의 흔적이 말해 주듯 늙으니 꽃 피우는 일이 힘들어 보인다. 그래도 향은 여전히 고고한 품위를 잃지 않고 있다. 홍매·백매·청매가 꽃망울 터뜨리면 동백꽃이 뒤따르고, 시골 처녀 볼 빛 닮은 살구꽃이 핀다. 조계산 기슭엔 찔레꽃, 산매와 아카시아꽃 향기가 절을 자욱하게 덮고, 모란이 지면 작약, 불두화가 경내를 환하게 밝힌다. 산딸나무, 층층나무, 때죽나무, 배롱나무가 연등처럼 피어날 때면 연지의 연꽃, 승방 화단의 상사화가 피어 장마철 시름을 달래주고, 차꽃 맑은 향이 경내에 가득하다.
달마전과 순조의 원당이었다는 원통전 사이 아주 은밀한 뒷문을 거쳐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장경각, 산신각 뒤란에서 무량수각 후원 비구니 스님 공부하는 것 잠시 훔쳐보고, 청파당 앞 대통에서 흘러나오는 물 한 잔 마신다. 소원을 빌면 들어준다는 오백 년 묵은 누운 소나무를 붙잡고 잠시 번뇌를 잊고 있다가 눈을 떠 보니, ‘깐뒤’라고 쓰인 뒷간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눈과 귀와 마음을 씻어냈으니, 이제 뱃속까지 씻어내라는 걸까. 버리고 또 버리니 이 얼마나 홀가분한가.
나는 가끔 뒷간에서 이어지는 호젓한 산길을 따라 조계산에 숨어든다. 비좁은 바위 틈새를 비집고 장군봉에 올라서면 발아래 겹겹이 어깨를 끼고 있는 산등성이들이 사바와 열반의 세상을 가르는 파도처럼 넘실댄다. 그 산등성이 아래에는 논배미들이 실뱀처럼 꼼지락거리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물고 있다. 어지럽다. 이러다가 사바의 바다를 건너는 용선에 올라타기도 전에 멀미하면 어쩌지. 푸른 숲이 산허리를 둘러싸고 너울너울 춤을 춘다.
조계산을 자주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선암사를 가슴에 품은 조계산은 엄마 품속처럼 아늑하고 따뜻해서 마음이 가는 곳이고,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고, 가면 안기고 싶고, 머무르고 싶은 곳이기 때문이다. 고찰이 전래의 풍치를 그대로 간직한 채 곱게 늙는다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일인지 알 것 같다. 신축한 절집이 하나도 없고 바람과 빗물에 씻긴 그대로 고색이 창연한 선암사는 풍미가 다른 절집과 확연히 다르다.
잠시 옷깃을 여미고 생각한다. 고희를 넘긴 내 모습이 과연 이 절처럼 곱게 늙고 있는가. 말이 안 되는 줄 안다. 그래도 저리 곱게 늙고 싶은 마음이야 간절한 것을 어쩌란 말이냐. 내려오다 한옥으로 곱게 지은 '야생차체험관'에서 녹차 한 잔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달래니 그나마 기분이 산뜻해진다.
선암사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곳에 순천만 국가정원이 있다.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연일 많은 관람객이 북적인다. 들릴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은 사람과 자연 사이의 공간에 정원 형태만 달랑 옮겨왔다는 점이다. 메마른 인위뿐. 그러기에 아쉽게도 쉬고 치유하는 곳이 아니다. 피로가 쌓이면 어찌할까. 선암사에 들러볼 일이다. 부처님의 은밀한 비원(祕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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