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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안개

by 안규수 2023. 2. 21.

                                                                      안개

 

                                                                                                     안규수

 

 

       영화 ‘헤어질 결심’을 봤다. 배우 박해일과 탕웨이의 매혹적인 사랑을 그린 영화로 박찬욱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작품이다. 영화 저변에 흐르던 노래가 가수 정훈희의 안개였고 박 감독은 인터뷰에서 ‘안개’라는 노래가 영화를 만드는데 큰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중 내 옆자리 앉은 60대 부부는 20여 분 지나자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영화가 재미없어서 그럴까. 영화에서 이어지는 대사나 장면이 등장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파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영화에서는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는 바람에 이야기 흐름과 반전 요소들을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거기에 탕웨이의 서툰 한국어 발음이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아무래도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다소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가 칸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는 뭘까. 역설적으로 기존 통속적인 사랑 이야기에 이골이 난 영화 평론가들, 영화 기자들, 영화광들 경우에는 그 숨은 의미들을 순간순간 파악하면서 그 깊이를 보고 감탄하고 열광한 것 같다. 이 영화가 펜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수시로 장면을 오버랩하는 부분과 해설을 풀어내는 장면, 그동안 인물 중심에서 풀어내는 연출을 또 다른 방식, 작품 속에서 모니터를 활용해 인물의 심리를 다른 각도로 비춰내는 등 독특한 연출에 있는 듯 보였다.

    영화의 절정은 파도를 감싸고 있는 듯한 안개다. 여기서 안개는 아픈 사랑을 의미하고 있다. 그녀는 ‘당신을 위해 내가 무너진 채로 살겠다’라는 해준의 고백을 듣고 죽을 결심을 한다. 서래는 모래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들어가 이과두주 한 병을 들이켠 후 밀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나 때문에 저 사람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라고 생각한 서래, 죽음을 선택한다. 뒤늦게 바닷가에 도착한 해준은 물이 차오른 바다에서 서래를 목메게 불러 보지만 끝내 보이지 않는다. 안개는 정적과 어둠과 제 색깔을 가진 모든 사물의 모든 색을, 정서를 흡수하고 감싸고, 안아 버린다.

  나는 이 영화를 관람하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이 떠올랐다. 나는 30대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다. 12월에 출간한 내 책 제목 ‘무진으로 가는 길’도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돈 많은 과부와 결혼한 덕분에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승승장구하던 주인공 윤희중은 아내의 권유로 휴가차 시골 고향에 돌아가 며칠 머문다. 자욱한 안개로 뒤덮인 그의 고향 무진은 그를 침울하게 한다. 어느 날, 그는 고향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서울에서 부임한 음악 교사 하인숙을 만난다. 술을 마시고 난 뒤 주인공은 그 여교사와 단둘이 귀갓길을 함께 걷는다. ‘헤어질 결심’의 등장인물들처럼 윤희중과 하인숙 사이의 긴 대화 속에는 환심과 긴장이 교차한다.

  윤희중에게 무진은 긴 악몽과 공상, 불면증, 초조함에 청년 시절의 어두움 기억이 음습한 안개와 같이 느른하게 깔린 곳이다. 그가 무진행을 결심하는 데는 뿌리칠 수 없는 그 무엇이 작용하고 있다. 이때 그 무엇의 정체는 바로 안개로 상징된다. 그에게 무진의 명산물이라 일컬어지는 것, 그 안개로 상징되는 무진은 윤희중에게는 덮어 버리고 싶은 아픔이 묻어 있는 곳이다. 하인숙과 첫 만남에서 그 무진의 냄새를 느끼고 과거의 자신과 같은 병을 앓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윤희중은 하인숙을 만난 후 자신이 애써 지키고 있던 욕망의 실체는 결국은 무의미한 것일 수 있으며 오히려 억눌러 왔던 감정들에 정직해지는 일이 오로지 자신의 의지로 일구어 갈 수 있는 삶이란 것를 깨닫게 된다. 그 깨달음은 하인숙에게 쓰는 편지로 확인된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되는 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윤희중이 사랑하고 있는 것은 하인숙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상기되는 과거의 자신이다. 두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에게 도덕적 잣대를 강요하지 않는다. 당시 사회의 분위기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인숙도 순진해서 남자의 덫에 걸려든 그런 여성이 아니다. 그는 윤희중이 어느 해, 그 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던 방죽 그 방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그 일 이후 윤희중은 하인숙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랑한다’라는 국어사전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쫓아 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영화 ‘헤어질 결심’도 불륜을 그리고 있다. 해준과 서래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입에 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나의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더라도 상대의 중요한 것을 지켜주는 일이 곧 사랑이라고 그들은 몸으로 말하고 있다. 애잔하고 감동적인 사랑에 관객들도 마음이 정화되면서 뜨거운 감동에 젖는다. 이 영화는 무진기행처럼 스릴러와 긴장감으로 시작하여 로맨스를 넘나든다. 관음(觀音)과 사랑 그 경계를 잘 녹여낸 점이 닮은 듯싶다.

  「무진기행」과 「헤어질 결심」에서 안개는 허무를 상징한다. 인생도 사랑도 허무가 아닐까. 정훈희의 노래 ‘안개’가 귓가에 은은히 들려온다.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거리

           그 언젠가 다정했던 그대의 그림자 하나

                                   ……

           안개 속에 외로이 하염없이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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