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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진트재에 오르니

by 안규수 2023. 2. 21.

                                                                    진트재에 오르니

                                                                                                        안규수

 

 

 

      겨울바람이 제법 차다. 목덜미를 스치는 바람에 가시가 달린 듯, 절로 목이 움츠러든다. 겨울바람이 차가울수록 겨울 바다는 오히려 맛이 깊어진다. 기름진 갯벌에서 꼬막은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바닷물고기는 튼실해진다. 겨울의 진미는 바로 꼬막이다. 냉장·냉동 기술이 발달해 사시사철 먹을 수 있다지만, 제철에 먹는 맛에 비할 바 아니다.

  ‘꼬막’ 하면 떠오르는 곳이 내 고향 벌교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맛이 일품인 꼬막은 아낙네들이 겨울에 개펄에서 캐낸다. 지난 주말에 찾은 벌교에는 꼬막 자루가 장거리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참꼬막은 생산량이 적어 금값이다. 30여 년 전만 해도 흔하던 참꼬막이 갯벌이 오염되어 지금은 청정지역인 여자만 장도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 대신 양식이 가능한 새꼬막이 많이 생산되고 있어 벌교 꼬막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내 수필의 무대는 벌교筏橋,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라는 뜻이다. 바다를 끼고 있어 글에서 풍기는 냄새는 고유의 갯내다. 어릴 적 엄마는 갯벌에서 꼬막을 채취해 꼬막 장국을 끓였다. 나는 그 장국을 먹고 자랐다.

‘벌교’ 하면 뭐니해도 조정래 작가의 역작 대하소설 「태백산맥」이 떠오른다. 선암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낸 작가는 소설에서 벌교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벌교는 한마디로 일인 日人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을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고을을 떠받치고 있는 낙안 벌의 끝에 꼬리처럼 매달려 있던 갯가 빈촌에 불과했다. 일인들이 내륙지방의 수탈을 목적으로 개발한 것이다. 벌교 포구의 끝 선수에서 배를 띄우면 순천만을 가로질러 여수까지 반나절이면 족했고, 목포에서 부산에 이르는 뱃길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벌교는 고흥반도와 순천과 보성을 잇는 삼거리를 담당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했다. 그만큼 왜색이 짙은 소읍이었다. 읍내는 자연스럽게 상업이 터를 잡게 되었고, 돈의 활기를 좇아 인구가 늘었다.”

 

  일제가 내륙지방의 곡물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수송하는 관문으로 이용한 사실은 부끄러운 벌교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순천에서 출발하여 ‘진트재’에 도착했다. 여기가 순천과 보성의 경계선이다. 진트재 전망대에는 낙안 금둔사 주지 지허指墟스님이 쓴 「나 이제 진트재에 오르니」라는 시비가 있다. 진트는 진토의 사투리다. 진토塵土란 정토淨土와 맞선 세속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 벌교 징광리에 있었던 이조 중엽에 폐사된 천년 고찰 징광사와 연관이 있는 이름으로 서방정토, 즉 극락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여하간 이 진토재 비문은 읽을 맛이 난다.

 

     주먹 자랑 마라는 땅

     깔담사리 하나가

    맨주먹으로

    맨주먹으로

    왜놈 헌병 열을

    죽게 패주었다는 곳

 

  벌교는 기氣가 억센 땅이다. 이 진트재에서 깔담사리가 왜놈 헌병 열을 죽게 패주었다는 이 시의 주인공은 담산이라는 전설적인 실존 인물이다. 보성에서 태어난 담산은 열 살 때 홀어머니를 부양하기 위해 남의 집에서 깔담사리로 시작해 머슴을 살았다. 청년 담산은 조국이 일제에 먹히자 1907년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려는 충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년 6개월 동안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보성 순천 지역 일본인 순사 군인 일진회원 등 200여 명을 사살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1910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다. 그의 본명은 안규홍으로 담산이라는 호는 깔담살이에서 따왔다고 한다. 당시 일제 통감부에서 거괴巨魁라 부를 정도로 명성을 날린 의병장이었다. 그의 피가 흐르는 고장이 보성이고, 바로 벌교다. 여수 가서 돈 자랑 하지 말고, 순천 가서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 가서 주먹 자랑하지 마라“ 는 속담 그대로다.

  회정마을 앞 중도 들판이 눈 앞에 펼쳐진다. 일제 때 중도(中島,나카시마)가 갯벌에 방죽을 쌓아 만든 간척지이다. 중도는 농민들에게 공사가 완공되면 소작을 준다는 조건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나라가 해방되면서 농민들은 그 땅이 당연히 자기들 소유가 될 줄 믿었다. 하지만 그건 헛된 꿈이었다. 지주들이 가로챈 것이다. 항의하면 소작논을 떼이거나 투옥당했다. 썩어 문드러진 관官을 등에 업은 지주들이 토지를 착취하니, 피땀 흘려 그 토지를 만든 농민들의 허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해방 3년 후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그다음 날 정오쯤 반군이 벌교에 들이닥쳤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한恨 많은 농민은 내심 이들을 환영했다. 반군의 피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가난한 농민들을 수탈한 지주들과 군경의 가족 등 반동분자로 지목받은 사람 대부분이 소화다리에서 총살되어 다리 밑 바닷물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만에 다시 수복되자 이번에는 군경의 피의 보복이 시작되었다. 언제나 피해자는 사상이 무엇인지 모르는 가난한 농민들이었다.

  내 고향마을 세동 뒷산 존재산 자락에 고려시대 창건되어 1680년 폐사된 징광사澄光寺라는 고찰이 있었다. 인근 송광사 선암사를 말사로 둘 정도의 규모가 큰 절이었다. 주로 불경 등 불교 서적을 인쇄하던 사찰로 지금도 송광사 박물관에 그 불경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징광사가 폐사된 이유는 대화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빈터에는 절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주춧돌이 남아 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비석 등 유물이 상당히 보존되고 있었으나 모두 도굴돼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어느 시골 마을처럼 쇠락해 가고 있던 벌교가 조정래의 소설의 첫 무대인 회정리 소화가 살던 그 집터에 「태백산맥 문학관」이 세워지고,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인 외서댁를 ‘쫄깃쫄깃한 겨울 꼬막 맛’이라고 비유한 대목에서 꼬막이 일약 명성을 얻어 벌교 일대가 문학 기행과 관광지가 되고, 그 덕분에 ‘꼬막 정식’은 전국적인 유명음식이 되었다.

  문학은 힘이 세다. 조정래 작가가 불후의 명작「태백산맥」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인 벌교에서 유년기를 보낸 것은 대하소설을 낳게 한 원체험이 되었다. 이는 작가 조정래의 행운이면서 우리 문학사의 축복이기도 하다. 그뿐인가. 쇠락해 가는 어촌마을을 소설이 살려냈으니 그 힘은 가히 그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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