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린다. 오늘같이 눈이 내리는 날은 방 안에 앉아 존 케이지의 소리 없는 연주, <4분 33초>를 감상하면 제격일 것 같다. 온통 하얀 세상에서 침묵의 묘미에 빠져보는 것, 겨울만이 주는 축복이 아닐는지 모른다. 외로움이 사람을 현자로 만든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워킹맘으로 위장한 킬러조차 자식을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하는 동서고금을 초월한 부모의 진리는 ‘너희만 행복하면 굴욕도 참을 수 있다.’이다. 거기에 ‘엄마 없인 못 살지만, 엄마랑은 못 산다’라는, 인터넷에 떠도는 자식들의 글을 보고 명언이라고 무릎을 치며 웃은 적 있다. 엄마랑은 못 산다고 손사래 치는 자식 입장을 충분히 안다. 물론 자식 쪽에서만 힘든 게 아니다. 성년이 되기 전 청소년 자녀를 둔 부모들 또한 이런 말에 ‘난들 너랑 사는 게 쉬울까’라고 생각한다.
영화 ‘길복순’(전도연분)에는 마주칠 때마다 충돌하느라 힘든 사춘기 딸과 엄마가 등장한다. 이 엄마와 딸에게는 서로 털어놓을 수 없는 심각한 비밀까지 있어서 공존의 괴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엄마 길복순의 비밀은 비싼 사립학교에 딸을 보내는 잘나가는 커리어우먼, “돈 자랑, 자식 자랑하는 극성스러운 엄마”들의 우아한 어머니회 회원인 그녀가 사실은 살인 청부업자이다. 그런 업종이 청부 살인이라는 디테일만 빼면 길복순이 사는 세상은 여느 직장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곳에는 일찍이 그녀를 발탁하여 모든 것을 전수해 준 보스(설경구분)가 있고 조직 안의 서열과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두고 암투를 벌이는 경쟁자(이솜분)가 있다. 조기 은퇴하고 편히 쉬고 싶다는 조바심이 있고 자신을 키워준 조직을 쉽게 떠날 수 없다는 의리가 있다. “힘 있는 사람들을 더 힘 있게 만드는 세상 규칙”을 들이대며 지키라고 강요하는 대기업도 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전문 킬러라는 정체를 딸이 절대 알아서는 안 되는 길복순처럼, 대부분 부모에게는 집 밖 일상을 자녀가 굳이 모르는 편이 좋다. 직장에서 날마다 생기는 더럽고 치사한 일들을 괴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처럼 참고 또 참는 세세한 사정은 자식이 모르는 편이 낫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푸념이 가끔 튀어나올지언정 자신의 몫인 밥벌이의 지겨운 사정을 자식이 속속들이 알기 원하지 않는다.
엄마 길복순의 비밀이 먹고사니즘의 숙명적 고통에 관한 것이라면 딸 길재영의 비밀은 태생적이고 존재론적인 비밀이다. 결이 다른 두 비밀을 엄마와 딸이 각자 움켜쥔 채, 머리카락 보일라 꼭꼭 숨겨 감추려는 의지와 꼬리가 길면 잡힐 수밖에 없는 행적이 맞물려 영화의 서사적 긴장이 팽팽해진다. 엄마는 딸에게 “상대의 약점을 발견하면 살려달라는 소리 나올 때까지 물어뜯어야 한다”라는, 몸으로 터득한 생존법을 전수하고 싶어 한다. 딸은 “세상은 원래 불공정한 거”라는 꼰대 식 합리화를 들이미는 엄마를 “그러지 말고 자식에게 정당한 경쟁을 하라고 가르치라”며 오히려 훈계한다.
영화 결말에서 딸은 자신을 속박하던 비밀에서 벗어나지만, 엄마에겐 그런 해피 엔딩이 허락되지 않는다. 길복순이 할 수 있는 건,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딸에게 “너는 아무 잘못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러워 말라”고 응원한다. 자신은 갈 수 없는 밝은 세상으로 딸을 등 떠밀어 보낸다.
남들이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면 극히 혐오함 할 거라는 두려움을 떨치고 거짓말의 세상을 부수고 나와 환한 미소를 짓는 딸과는 대조적으로 끝내 어둡고 음침한 비밀 속에 자신을 감추는 길복순을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너의 타고난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며 살라는, 자식에게 빌어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을 줄 수 있다면, 스스로는 이 모든 치욕과 가책을 감당할 수 있는 게 바로 부모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너희가 좋은 세상에서 젊은 패기를 한껏 펼치며 살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의 한세상 고달팠던 서러움도 눈물도 다 괜찮다는 그 마음. 동서고금을 초월해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강력하게 이 세상이 더 나아지도록 등 떠밀어 온 힘의 비밀을 마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고 최근 인천에서 계모가 전처 아들(이시우 만11세)을 학대하고 굶겨 죽인 끔찍한 일이 생각났다. 그 계모는 겉으로는 하나도 빈틈을 보이지 않는 깔끔한 여인이었다. 그런 그가 초등학교 5학년인 어린아이를 학교도 보내지 않고 집안에 데리고 있으면서 학대한 일은 너무나 끔찍했다. 물이 가득 찬 욕실에 자주 가두고, 의자에 앉혀 놓고 6시간을 눈을 가리고 두 손을 의자 뒤로 묶어 둔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 어린 학생이 죽은 뒤 체중이 25킬로였다고 하니 굶겨 죽인 것이다.
계모는 이웃들에게 친절하고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열심히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에 나는 경악했다. 심리학자들은 계모가 연극성 성격장애와 자기애성 성격장애라고 진단했다. 그런 걸 떠나서 사람이 어떻게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얼굴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가족이야말로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가족을 사랑할 때는 도저히 가능하지 않았던 힘까지 솟아오르는 것을 뜨겁게 경험했다. 나는 거기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화해는 동행의 또 다른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하는 분량이 곧 행복 분량’이라는 걸 잊지 말 일이다. 새삼스럽게 내 가족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