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스스로 하는 질문이다.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린 시절 유난히 여리고 몸이 허약했다. 아버지가 키만 보고 일곱 살에 입학시키는 바람에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해 2학년에 올라가서야 한글을 깨칠 수 있었다. 교실에서는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늘 외톨이였다.
초등학교 때 내 별명은 ‘가시내’였다. 내 이름 ‘규수圭水’에서 따온 별명으로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지어 주셨다. 멀쩡한 사내를 가시내라고 놀려대는 동무들과 싸움도 많이 했다. 그 별명이 죽고 싶도록 싫어 홀로 눈물짓던 아이, 그 이름에 대한 열등감은 쉽게 사라질 줄 몰랐다.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일탈과 모험보다는 편협하고 고정된 관념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상고를 졸업하고 스물둘에 결혼했다. 4대 독자인 아버지가 정해 둔 배필이 있었다. 대학 진학을 준비하고 있던 참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내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첫딸이 태어나고 다음 해에 군에 입대했다. 육군통신학교 신병 때 선임병들의 밤마다 계속되는 기합과 폭력을 견디기 힘들어 탈출구로 월남 파병을 자원했다.
월남 중부 백마부대, 죽음의 계곡으로 유명한 뚜이호아 도깨비부대 최전방 중대에 배속돼 수많은 전투와 매복 작전에 투입되었다. 죽음의 냄새가 득실거리는 정글에서 1년 5개월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혼돈의 틈새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나는 나약한 자신의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그런데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 겁 없이 죽음의 늪에 뛰어든 자신의 무책임한 행동을 수없이 자책했다. 거기에다 밤마다 전투 현장의 악몽이 재현되는 트라우마로 악몽에 시달려 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도 생전에 그는 젊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질문을 받았다. 다시 태어나면 무슨 일하고 싶은가? 그는 ‘일 잘하는 사내’라는 제목의 시로 답변을 대신했다.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
소박한 삶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가벼우면서도 사려 깊은 답변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돌아가는 길에서 그 말을 생각하며 울었다고 한다. 그들은 왜 울었을까? ‘홀로 남은’ 작가가 안쓰러워 그랬을까? 작가는 스무 살 때 결혼하고 스물넷에 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평생을 홀로 살았다.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든 소설은 사실 그에게 생활의 방편이었다. 생전 사랑하는 사람과 시골에서 오순도순 살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젊은이들의 회귀본능과 그리움을 자극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 삶을 연민으로 묘사했다. 가난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갈대 꺾어 지붕 얹고 때로는 밀렵꾼 손목 부러뜨리고 새들 지켜 주며 행복하게 살고 싶은 그런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시를 읽고 마음이 뭉클해지며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의 일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나이 열여덟에 동네 총각과 눈이 맞아 결혼했다. 스물에 태평양전쟁에서 남편을 잃고, 해방되던 해 스물넷에 가난한 친정을 먹여 살리기 위해 마흔이 넘은 아버지를 만났다. 그 이듬해에 내가 태어나 집안에 그런 경사가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정월 대보름날 밤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집 앞 들길을 걸었다. 엄마는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물끄러미 날 바라보시더니 긴 한숨을 내쉬시며 말씀하셨다.
“너 뭣 헐려고 태어났냐!”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날 밤 달빛은 엄마의 아픈 상처에 담긴 한恨의 은유였다. 튼실한 사내를 만나 초가삼간 오두막에서 농사지으며 아들딸 낳고 오순도순 살고 싶은 소박한 속내가 달빛에 투영되지 않았나 싶다. 엄마는 자신의 연민을 소박한 삶에 대한 보편적인 그리움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무처럼 살고 싶다. 나무는 말이 없다. 유구한 세월 자연의 순환 속에 주인공은 나무이고 나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일 뿐이다. 나무는 자신의 분수에 맞게 자족할 줄 알고, 고독을 견디고, 즐길 줄도 안다. 자연에서 나이 들면서 품위를 더해 가는 것은 나무밖에 없다. 긴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알몸으로 이겨 낸 뒤 얻어진 초월과 해탈 때문은 아니다.
산은 절간이요, 나무는 묵언 정진하는 수도승이다. 나무는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이 온갖 칭찬을 늘어놓아도 으스대지 않는다. 바람을 보면 연인을 만난 듯 수다를 떨며 하고 싶은 말을 다 한다. 나는 가슴이 답답할 때면 나무숲에 든다. 깊은숨을 몰아쉴 때마다 나무는 푸른 제 숨을 주고 제대로 숨 쉬며 오롯이 사는 일이 온전한 삶이라고 나직이 일러 준다.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즐겁다. 사람들의 기침 소리가 여전히 들리는 듯하고 태胎자리가 아직도 선연해서다. 마을 앞에는 늙은 소나무가 장승처럼 버티고 서 있다. 한여름 천둥을 몇 개씩이나 품었던 그 나무 앞에 서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동안 무엇을 했나? 시시포스처럼 평생 굴러떨어진 바위를 들어 올렸는데도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면 나무는 솔가지를 흔들면서 말을 걸어온다. 이제 모든 일을 내려놓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고향은 그리던 고향이 아니다. 어린 시절 불던 풀피리 소리 아니 나고 적막한 골목길을 걸으면 노인들의 기침 소리에 메마른 입술이 쓰디쓰다. 머지않아 마을은 사라질 운명이다. 오직 이 소나무만이 변함없이 외롭게 마을을 지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