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두칠성 / 안규수
‘광야 원정대’는 성경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는 테마였다. 그것은 약속의 땅을 정탐할 사명을 가진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이다.
모세는 각 지파에서 뽑은 열두 명의 지휘관들에게 약속의 땅에 먼저 가서 정탐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들을 파송했다. 그것이 광야 원정대다. 사십 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이 그 땅에 대해 악평을 쏟아놓았던 날이었다.
성서력으로 아브월 9일을 티샤브 아브(Tisha B’Av)라고 해서 이스라엘은 그날을 자신들의 국치일로 기념하고 있다. 8월 8일이 그날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일 년 중 그날을 가장 수치스럽고 후회되는 날로 기억하고 통곡의 벽 앞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마음을 찢는 회개의 애곡을 외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땅을 악평했던 그들의 말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되었고, 악평했던 세대는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광야에서 생을 마치는 큰 저주를 받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아브월 9일은 반복되는 저주와 멸망의 사건들이 계속 이어졌다. 큰 역사적 사건들만 정리해보면,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1차 성전이 무너졌던 날이 아브월 9일이다. 그런데 AD 70년에 2차 성전이 로마에 의해 무너진 날도 같은 날인 아브월 9일이다. 1290년에는 영국에서 에드워드 1세의 명령으로 유대인들이 추방된다. 그날도 아브월 9일이었다. 1306년 프랑스에서, 1492년 스페인에서 유대인이 추방되는데 모두 아브월 9일이다. 1935년 아브월 9일에는 유대인 학살 결의안인 뉘른베르크법이 독일 의회를 통과하고 6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 이 모든 일이 놀랍게도 다 같은 날 일어났다.
대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땅에 대한 악평의 결과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 ‘악평’이라는 것이 단순히 열두 정탐꾼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세계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악의 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선악을 판단하는 열매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이고, 이방인들과 특별히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악평을 쏟아내고 분노하는 반유대주의에까지 이어지는 저주였다. 비단 나치 독일뿐 아니라 유대인들과 함께 살아가던 유럽의 여러 나라들, 영국이나 스페인 등 여러 지역에서는 이미 그 백성들에 대한 악평이 분노로 변해갔고 곳곳에서 추방과 함께 토라와 탈무드를 불태우는 일들이 일어났다. 십자군에 의해 헤아릴 수 없는 학살과 폭행이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났다.
이스라엘의 티샤브 아브(아브월 9일)에서 인간이 창조되어 세상을 지키고 충만하게 할 인간이 ‘악평’이라는 저주의 도구가 될 때 모든 것이 파괴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서도 이 사실이 잘 드러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셨다.(창세기 12:3)
골로새서 2장 18절을 보면 악평이란 자신이 본 것에 의지하여 과장된 두려움을 만들면서 나오게 되는데, 그것은 결국 내가 머리가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머리는 예수님이고 그것을 붙든 자들은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았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해서 판단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하심이 판단의 기준이 되었다.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하면서 울부짖었다.(민수기 14:6-8)
결국 십계명과 율법에서 말하는 보이는 신을 만들지 말라는 경고는 우리가 얼마나 보여지는 것에 쉽게 현혹되고 하나님을 부정하는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가 판단의 기준을 보이는 것에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둔다면 내 입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대언자가 될 수 있다. 톨스토이의 「북두칠성」이라는 단편이다.
'어떤 나라에 극심한 가뭄으로 풀과 나무가 완전히 말라버렸다. 병든 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소녀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리기 위해 빈 항아리를 들고 방방곡곡을 헤맸다.
그러나 어디에도 물은 없었고 길을 거닐던 소녀는 지쳐 쓰러져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던 소녀의 눈에 쓰러져 죽어가는 강아지가 들어왔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강아지에게 물을 조금 나눠주었는데 항아리가 은으로 변하며 다시 물이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어머니에게 물을 떠드렸다. 고생한 소녀의 모습을 본 어머니는 사랑하는 딸에게 먼저 물을 마시게 했다. 그러자 항아리가 금으로 변하더니 물이 다시 채워졌다. 그때 한 걸인이 나타나 물을 조금 줄 수 있겠냐고 묻자, 소녀는 흔쾌히 항아리를 건넸다. 그러자 항아리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로 변했고 이내 하늘로 올라가 반짝이는 7개의 별이 되었다.'
톨스토이는 사랑의 방향이 자기 자신이 아닌 이웃과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나의 사랑은 지금 어디로 흘러가고 있을까? 사랑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이미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흘려보내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다시 이웃에게,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