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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어머니의 기도 / 엄기백

by 안규수 2014. 11. 6.


  술이 아직 덜 깬 채로 터벅터벅 걸어오던 중 시내 중심가 아카데미극장 앞에서 느낌이 아주 이상한 아저씨와 맞닥뜨렸다. 그런데 그 아저씨는 나를 보는 순간 감탄사를 토해내며 먹잇감을 만난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었고 나는 생명에 위협을 느낀 겁먹은 어린 양처럼 꽁지가 빠지랴 뒤돌아 뛰기 시작했고 이 거리 저 골목을 쫓기고 쫓으며 5분여의 추격전 끝에 막다른 골목에서 맥없이 잡히고 말았다.

  사복형사인 그 아저씨는 내 머리채를 움켜잡고 파출소로 끌고 들어서면서 임마, 이거 3인분이제?”라며 우쭐해하며 으스댔고 파출소의 경찰관들은 아침부터 웬 떡이냐며 환호와 함께 박수를 쳐댔다. 그 아저씨는 마치 베트콩 포로를 잡은 맹호부대 용사처럼 개선장군의 모양을 하고 있었고 인계 받은 경찰관들은 덕분에 당일의 정량이 해결됐다며 담배까지 권하며 감사해했다. 도저히 그런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잠시 후 그들의 대화중에 당시 각 파출소당 하루에 장발자 세 명 이상을 잡아서 본서에 보내는 것이 임무이고 배당이었던 기막힌 현실을 알고는 정말이지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허지만 나로서는 거부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다. 일사천리로 본서로 이송되고 이어서 즉결 재판에 회부되면서 판사인 듯한 분의 판단 아래 급기야는 경주경찰서 유치장에서 구류 3일을 받게 되었다. 눈 깜짝할 사이 이루어졌고 어떤 조치도 아무런 무엇도 취할 수가 없었다.

  서울로 간다는 인사도 없이 며칠 동안 사라진 아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던 어머니는 친구에게서 경주경찰서 유치장에 있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셨다 한다. 온 머리를 쥐가 파먹은 형상을 하고 3일후에야 대문을 들어서는 나에게 어머니는 조금의 동요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내 앞을 막아서시고 가슴이며 등이며 내 몸의 앞뒤에 소금을 뿌리셨다. 그리고는 준비해둔 생두부까지 먹이고는 조용히 장독대로 걸어가셨다. 어머니의 그 민첩하고 담담한 행동에 적이 놀래면서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어 뒤따라가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엄마! 미안해요를 반복해서 주절댔다. 어머니는 그냥 짤막하게 고맙다!”만 몇 번 되풀이하신다. 그 영문 모를 표정과 고맙다라는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단어와 진정 어린 느낌으로 나를 위로 하시고는 곧바로 꿇어앉아서 기도를 하셨다.

  다음 날 아침 상경하는 빡빡머리 아들을 배웅하시는 어머니는 아들의 두 손을 꼭 잡고 기도하듯 당부의 말씀을 전한다.

  “올해는 정말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이번에는 고맙게 그 정도로 액땜을 했는데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니가 모든 것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 어느 누구 하고도 절대로 싸우면 안 된다. 알았제!”

못 미더웠던지 참다 참다 못해 다시 꺼내시는 말,

  “기백아! 사실은 엄마가 어디 가서 봤는데올해 정말 정말 조심해야 한다. 알았제? 정말 정말 조심해야 된다. 응 기백아!”

  뜬금없이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란 말인가? 순간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연출했고 일그러진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어쩔 수 없이 그 사연을 설명 할 수밖에 없었다. 얘기인즉슨, 용하다는 점쟁이한테 점을 봤는데 아들이 올해 감옥소에 갈 괘와 살인을 할 괘가 나오니 우선은 집굿을 해야 되고 특별히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 해야 하고, 또 본인이 모든 행동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솔직히 나는 어머니의 그 큰 걱정과는 달리 대수롭지 않게 그냥 그렇고 그런 웃기는 점쟁이의 소리쯤으로 여기며 편안히 상경을 했고 서울에서 늦깎이 신입생 생활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 3개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 엄청난 점괘 덕에 어머니는 더 많은 시간을, 더 다양한 기도를 하셨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예정된 8월에 훈련소로 입대하여 별 사고 없이 9월 말쯤 자대로 배치되어 겨우 두어 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입대한 지 4개월이 지난 7411월 말쯤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경북 죽변항. 멀지 않은 곳에 등대가 보이고, 바로 코앞에 광활한 동해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자리 잡은 해안 경비 대대 본부에서 일등병 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높지는 않지만 산꼭대기라 물 사정이 많이 좋지 않았다. 특히 식수 사정은 더욱 좋지 않아 각 부서별로 매일 일정량의 물 사역을 해야 장병들이 취사를 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나를 포함한 상황실 졸병 두 명이 물사역병으로 차출되어 아래 민가로부터 함께 물 사역을 하던 중이었다. 마침 사무실 바로 위 고참과 물 깡통을 들고 낑낑대며 부대로 돌아오던 중 산비탈 입구 구멍가게 앞에서 잠시 쉬게 됐는데 우리 둘은 아무 생각 없이 물 깡통을 내팽개쳐 놓고 대책 없이 막걸리를 마신 것이다. 물을 퍼 나르는 진도가 더디었었던지 사역을 내보낸 취사반장이 우리를 찾아 나섰고, 우리 둘은 막걸리 몇 사발씩을 마신 죗값으로 동네 민간인들이 보는 앞에서 온갖 욕설과 발길질을 당하며 수모를 겪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가파른 산비탈을 큰 물 깡통을 낑낑거리고 들고 오면서 뒤통수를 두들겨 맞으며 취사반으로 들어섰고. 그 고참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이라도 한 듯이 물통을 놓자마자 밥 푸는 취사용 부삽으로 내 등을 내리쳤다. 눈 깜짝할 사이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나는 숨이 헉 멎으면서 물이 질퍽한 취사장 시멘트 바닥에 그냥 처박히고 말았다. 그리고는 삽시간에 그 고참의 발 아래 내가 거꾸로 엎어져 있는 것이다. 내 얼굴은 취사장 바닥의 흥건했던 물에 적셔지고일어날 수가 없었다. 또 눈을 뜰 수도, 떠지지도 않았다. 맞아서 어디가 잘못되어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분함과 수치심에 그냥 그렇게 일어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참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정말이지 모든 것이 턱 없이 부족한.

글로써 표현할 수 없는 부족한 사람에게 당한 테러는 이런 저런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한마디로 아주 간단하고 군더더기 없는 액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숨을 몰아쉬며 고참의 다리를 꺾으며 일어서자마자 곧 바로 멱살을 잡고 어마어마하게 큰 국솥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국솥 안은 반쯤 찬 물이 펄펄 끓고 있었고 뜨거운 물방울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 일어난 일이라 그 고참의 상체부분은 이미 솥의 가장자리를 벗어나서 얼굴과 머리는 뜨거운 김으로 데이고 있었다. 난 이미 이성을 잃고 있었고 그 김의 화끈거림이 내 손 전체에 전달되고 그의 몸을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순간,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의 말씀과 눈물을 글썽이며 기도하는 모습이 눈앞을 스치고 있었다. 연이어 함께 물 사역을 하던 고참의 떨리는 부르짖음이 들렸다. ‘엄 일병!’ 울부짖는 그 소리와 어머니의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헐크처럼 괴성을 지르며 그 고참을 내가 쓰러져 있던 그 바닥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는 그냥 주저앉아서 눈물을 펑펑 흘리며 마냥 엄마! 감사합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를 수도 없이 되뇌었다. 그날 밤 나는 십여 명의 고참병들에게 보급 창고 안으로 초대(?)받고 린치를 당했다. 엉덩이며 가슴팍이며 온몸에 몰매를 맞으면서도 어머니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내 어머니의 기도에 수없이 감사를 드렸다.

  그런 사건도 모르는 채 어머니는 그 후, 그리고 또 그 후에도 계속 눈물의 기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 그 어머니의 눈물은 단 한 번의 어떤 보상도 받아 보지 못한 채 먼 곳으로 사라져버리고 그냥 그렇게 불효 심한, 이제 60을 바라보는 나이든 아들의 뇌리 속에나 박혀 오늘도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질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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