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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옥 '주먹만 한 구멍 한 개'

by 안규수 2015. 3. 6.

바람이 자전거의 녹슨 귀를 때렸다
마른버짐이 번져가는 둑을 내려가
아버지는 강바닥을 망치로 깼다
얼음판은 쉽게 구멍을 내주지 않았고
한 떼의 쇠기러기들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겨우 주먹만 한 숨통을 뚫은 아버지는
무료한 생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나는 나무토막을 주워 모닥불을 피웠다
마디를 가진 것들이 타닥타닥 소리를 냈다
아버지는 몇 번째 마디에 머물러 있는 걸까
불 꺼진 자리가 얼룩으로 누웠다
아버지가 뚫어 놓은 구멍은
헛것만 낚아 올리다가 없어졌고
그 깊고 아득한 구멍은
마침내 내 안에 커다랗게 입 벌리고 있다

 
 
시 ㆍ낭송_ 이영옥 – 이영옥(1960~ )은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200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라진 입들』 『누구도 울게 하지 못한다』 등이 있다.

 
 
이 시를 읽으며

    언 강바닥을 깨 주먹만 한 숨통을 뚫은 아버지는 사는 게 답답했겠지요. 삶의 중압감에 눌려 있었겠지요. 그랬으니 어린 딸의 손을 잡고 강에 나가 얼음을 깨고 숨통을 열었겠지요. 그 구멍에서 물고기를 낚기보다는 꽉 막힌 숨이나 쉬며 한 세월을 견디려고 했겠지요. 어린 딸은 애비의 속도 모르고 신이 나서 나무토막들을 주워 와서 모닥불을 피웁니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도 주먹만 한 구멍도 사라졌겠지요. 다 자라버린 딸은 제 안에서 커다랗게 입을 벌린 “깊고 아득한 구멍”을 찾아냅니다. 누구나 삶의 한 가운데 텅 빈 형식으로서 이런 구멍이 하나쯤 있는데요. 이 구멍에 귀를 갖다 대면 광인의 울부짖음이나 천 명이 내쉬는 한숨소리가 울려나올 때도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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