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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가/홍윤숙

by 안규수 2015. 2. 2.

길을 걷다가

 

 

 

 

 

 

 

길을 걷다가

잠깐씩 발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잎 떨군 나뭇가지들이

기하학적 선으로 아름다운 문양을 그리고 있는

그 모양이 처음 본 세상처럼 신선하다

묘연한 길 끝 어딘가에

젊은 날의 초상화 한 폭 떠오를 것도 같은

나는 다시 걷는다

가다가 다시 돌아본다 돌아보는 일이 조금씩

즐거워진다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무수한 시간의 조각들이 끝도 없이 나르는 길을

오선지에 사분음표 도레미파 파미레도

오르내리는 악보처럼 찍으며 걸어간다

언제까지 이렇게 걸을 수 있을까

이 길에 머지않아 겨울 깊어지고 얼음 깔리면

다시 구석진 골방 흰 벽에 갇혀서

공허한 허기를 삭은 등뼈로 버티겠지

오늘 아직은 남은 길에 햇살 따스하니

하루를 천 년처럼 누리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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