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수리에 꽂을 깃발도 없이
뺏고 빼앗기는 무슨 고지전이라도 치르듯
산을 건성으로 읽으며 오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산기슭이나 길섶에
있는 둥 마는 둥 낮게 엎드려 사는 풀꽃이 눈에 띄었다
아니 그가 먼저 구름 낀 나의 눈꺼풀을 열어 주었다
그들의 온갖 삶을 기웃거리다보니
꽃 피고
꽃 지고
어찌 보면 산은 한 권의 잠언 집
산을 정독하다 보면 속인을 버리게 된다
고목을 텅텅 내리꽂는 새부리
이끼 낀 바위의 고태 미는
나도 그렇게 단단하게 늙어가라고 거기에 있었다.
구멍 나고 뒤튼 고목의 은유를 읽게 되면서 부터
내 메마른 영혼에 물렁물렁 고요가 스며들게 되었다
뒤에 오는 사람에게 얼른 길 비켜주며
종아리에 힘 붙고 사색의 골 열리게 되었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골짝 물에는
어제도 오늘도
나를 종이배 띄워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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