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 울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가정’ (동아/ 2014-05-24)
▲ 에바 아르미센의 ’가족의 초상’.
가족은 힘과 용기를 주지만 가끔 짐도 된다. 완벽하지 않은 사람들이 부모 형제 배우자 자식으로 부대끼며 사는 것이 어디 쉬운가. 그럴 때 싱가포르가족협회의 동영상은 생각을 바꾸는 길을 제시한다. 한 장례식장에서 고인의 아내가 남편 칭찬 대신 엉뚱하게 침실 이야기로 말문을 연다. 난처한 표정의 추모객들에게 밤마다 코 곯던 남편이 자기 방귀소리에 놀라 깼다는 일화를 들려준다. 사실은 고약한 분풀이가 아닌 절절한 그리움의 토로였다. 그때는 성가시고 귀찮았는데 병이 깊어지니 그 모든 것이 남편이 살아 있다는 증거였음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잠들기 전 다시 한 번 그 소리를 듣고 싶다며 아내는 끝으로 자식들을 향해 말한다. “너희들도 아름다운 결점이 있는 배우자를 만나기 바란다. 네 아버지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소소한 것이 간절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평범한 일상과 사소한 단점이 우리 삶을 완전하게 만든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는 거다. 멀고 어려운 곳에서 헤매느라 쉽고 가까운 행복을 놓치면 안 되는 이유다.
엄마가 입원한 지 넉 달째, 주말은 둘만의 데이트 시간이다. 재활치료와 요양을 겸한 병원에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말과 행동이 어눌한지라 표정 변화를 읽기 힘든데 가족이 다녀간 날은 단박 표가 난다. 얼굴은 환하고 눈빛이 또렷해진다. 이제 누군가의 엄마, 아빠로 정신없이 달려온 세월에서 멀어진 어르신들은 신발 크기를 말할 때 ‘문수’란 단위가 익숙한 세대다. 그 주름진 얼굴들 위로 ‘청록파’ 박목월 시인의 ‘가정’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아홉 켤레 신발이 들려주는 흑백사진 같은 가족 이야기에 스페인 여성화가 에바 아르미센이 그린 알록달록한 ‘가족의 초상’을 맞물려 본다. 가족애를 화두로 한 글과 그림이 동과 서를 넘어 공명한다.
집안일로 머리가 복잡해지면 왜 나만 이렇게 난도 높은 문제지를 안고 씨름해야 하는지 투덜대기 마련이다. 서글픈 가정의 달, 그런 고민이 누군가에겐 사치가 돼버렸다.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부족한 사람들끼리 좋은 일 궂은일 의지하며 사는 오늘 하루가 선물이다. 대한민국이 가슴 저미는 상실의 아픔을 겪으며 얻은 삶의 교훈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